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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 십자군 이야기(6) – 콘스탄티노플 함락

제 4차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의 몰락

역사 연표

  • 1195년: 이사키오스 2세(Issac II), 자신의 형인 알렉시오스 3세(Alexios III)에게 황위를 찬탈당한다.
  • 1198년: 로마 카톨릭 교황에 인노첸시오 3세(Innocent III)가 취임하다. 교황은 네번째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다.
  • 1201년: 각국의 영주들이 모여 십자군 결성을 확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군수 계약을 맺는다.
  • 1202년 10월 8일: 십자군의 저조한 참여율로 인하여 계약이 파기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십자군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같은 로마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 왕국의 도시 차라(Zara)를 공격한다. 이에 교황은 십자군 전원을 파문에 처한다.
  • 1203년 4월: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Alexios IV)가 십자군을 찾아간다. 알렉시오스 3세를 비잔틴 제국에서 몰아내 줄 것을 요청.
  • 1203년 6월 24일: 십자군을 태운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다. 이후 약 한달여간 공방전이 펼쳐지고,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승리한다.
  • 1204년 4월 9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시민 폭동 발생.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가 살해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비잔틴 제국에 개입.
  • 1204년 5월 12일: 비잔틴 제국의 몰락.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라틴 제국을 건설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Baldwin I of Constantinople)를 초대 황제로 추대한다.

역사적 배경

제 3차 십자군 이후 1200 년대 초의 중세 유럽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잉글랜드 왕국은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사후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에 빠져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역시 내전에 휩싸여있는 상태였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던 아이유브 왕조 역시 살라딘 사후 정권 획득을 위한 정치적인 혼란에 빠져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점차 혼란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황인 인노첸시오 3세는  1198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 새로운 십자군의 결성을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에 응한 것은 제 3차 십자군 때와 달리, 유력 국가의 국왕이 아닌 지방 영주들이었다. 영주들과 기사들이 중심이 되었던 십자군이었던 제 1차 십자군의 성공을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이 이번 십자군에 대한 기대를 품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결성된 제 4차 십자군은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해로를 이용하여 성지에 도착할 계획을 수립한다. 일개 영주들이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거래를 통하여 성지까지 이동할 함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제 4차 십자군과의 계약을 수락하였다.

  • 33,500명의 사람과 4,500마리의 말을 이집트로 수송한다.
  • 인원 및 군마에 대한 1년치 식량을 베네치아 공화국이 준비한다.
  • 제 4차 십자군은 이에 대한 비용으로 총 8만 5천 마르크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지급한다.

하지만, 이 계약은 곧 틀어지게 되었는데, 제 4차 십자군에 참전을 한 총 인원이 예상 인원을 훨씬 밑도는 1만 여명에 불과했고,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지급해야 할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측에서도 미지급 비용 부분에 대한 할인에 난색을 표했는데, 이미 제 4차 십자군과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큰 지도에서 베네치아와 차라 / Venezia and Zara 보기

결국 대안으로 결정된 사항은 당시 헝가리 왕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도시인 차라(Zara)에 대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협동 공성이었다. 아드리아 해에 연안 위치한 차라는 베네치아의 해상 무역로 확보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배네치아 공화국의 세력권에 넣어야 할 요충지였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모두가 찬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헝가리 왕국은 십자군과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국가였고, 때문에 같은 종교를 가진 국가의 도시를 십자군이 공격한다는 것에 대하여 주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Doge: 국가 원수)였던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의 협상력에 굴복하여 십자군 역시 차라 공방전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공방전이 벌어진 1주일 만에 차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십자군이 같은 로마 카톨릭 국가의 도시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분노하여 십자군 전체를 파문에 처해버렸다. 당황한 십자군 지도자들은 교황에게 사죄를 하고 곧 파문은 해제되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파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에 이득이 되는 일을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차라를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잔틴 제국의 망명 황자인 알렉시오스 4세가 지도부를 방문한다. 그는 십자군이 현재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키우스 2세를 복위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하여 거사 성공 시 20만 마르크의 군자금, 비잔틴 제국군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십자군에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관할로 주겠다고 제안하게 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수송 선단을 아드리아 해에 띄우게 된다.

주요 인물들

엔리코 단돌로(1107? ~ 1205)

베네치아 공화국을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외교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비잔틴 제국과의 강화협상을 하기도 하였고, 시칠리아에 베네치아 대사로 2회나 파견되기도 하였다.  엔리코 단돌로는 1193년 1월 1일 베네치아의 제 39대 도제(Doge: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는데, 이미 고령에 시력의 대부분을 잃었으나,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고 한다.

제 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접근해 왔을때, 그는 뛰어난 외교적인 수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익을 증강 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십자군에 의한 차라(Zara) 공격과 이후 콘스탄티노플 공방은 사실상 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 무역에 있어서 다른 무역 도시 국가(제노바, 피사 등)에 비하여 월등히 높은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라틴 제국이 성립 된 이후, 병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소피아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보두앵 1세(1172 ~1205)

플랑드르와 에노의 백작인 보두앵 1세는 제 4차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비잔틴 제국 침략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시킨 후, 괴뢰 정부인 라틴 제국을 설립 할 때 초대 황제로 옹립된다.

보두앵 1세는 라틴 제국의 황제로 등극 한 이후 비잔틴 제국의 전통을 폐기하고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비슷한 제도를 만들어 기사들과 제후들에게 봉토로 나누어주었다. 라틴 제국 건립 이후 비잔틴 재건 세력의 반란과 함께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인 칼로얀이 공격해오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하여 분투하나, 1205년 불가리아군에 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4세(1182 ~ 1204)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로, 자신의 큰아버지인 알렉시오스 3세가 쿠테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하자, 비잔틴 제국을 빠져나와 신성로마제국에 의탁하게 된다. 이후 제 4차 십자군이 차라를 점령하자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한다.

제 4차 십자군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되었을 때, 유폐되어 있던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오르게 되지만, 정치/외교적으로 무리한 결정을 내린 가운데 시민 폭동으로 인하여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3세(1153 ~ 1211)

이사키오스 2세의 형. 이사키오스 2세가 불가리아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1195년 4월, 쿠데타에 성공하여 동생의 황위를 빼앗는다. 하지만 권력 욕심에 비하여 통지 능력은 무능했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경제난은 점차 심각해졌으며, 때문에 발칸 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감소하였다.

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할 때, 그는 막대한 재산을 챙겨 트라키아로 도망쳤다. 이후 망명지에서 자신의 권력을 찾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211년에 유폐 당한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사키오스 2세(1156 ~1204)

이사키오스는 아나톨리아의 군사귀족 가문 출신으로 본래 황가와는 먼 친척관계였다. 그는 황제인 안드로니쿠스 1세가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비운 사이에 시민 반란을 주도하여 그들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제국의 영토는 점차 축소되어 갔으며, 군사력 역시 조선업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맡기는 결정을 함으로써 해군력 약화를 초래하였다. 내정에서는 부정부패를 조장하기도 하는 등, 제국의 몰락의 단초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의의는 점차 퇴색되어만가고…

1203년 6월 24일 십자군 병력을 실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3중 성벽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제국의 수도였지만, 당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3세는 무능했고, 제국군의 군사력도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약 한 달여의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게 함락된다.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4세와의 약속대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이사키오스 2세를 다시 제위에 앉히고 알렉시오스 4세 역시 공동 황제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과 밀약한 군사 원조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영향권에 둔다고 하는 약속 또한 동방 정교를 믿고 있었던 시민들의 맹렬한 반발만 불러왔을 뿐이었다. 결국 십자군에 지급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올린 세금으로 인하여 1204년 시민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 모두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폭동을 빌미로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공격한다. 1204년 4월 9일 감행 된 총 공격으로 인하여 수많은 문화제, 보물등이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하여 약탈 당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여 지방 곳곳에 망명 정부들이 들어서게 되고,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새로운 비잔틴 제국-라틴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황은 같은 카톨릭계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를 공격한 일에 탐탁치는 않았으나, 이를 승인 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사실상 제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무리 되어버렸다.

비잔틴 제국의 망명 정권은 다음과 같다.

  • 니케아 제국 – 훗날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하여 비잔틴 제국을 재건한다
  • 에페이로스 공국
  • 트레비존드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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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 십자군 이야기(4) – 천상의 왕국

살라딘과 예루살렘 왕국의 분쟁.

역사 연표

  • 1174년: 살라딘, 아이유브 왕조를 수립한다. 예루살렘 왕국은 아모리 1세가 사망하고 ‘문둥이 왕’ 보두앵 4세 왕위를 계승한다.
  • 1177년 11월 25일: 몽기사르(Montgisard) 전투. 보두앵 4세가 살라딘의 대군을 물리치다.
  • 1179년 4월 10일: 바니아스(Banias)에서의 소규모 충돌. 보두앵 4세가 살라딘 군에 포위되지만, 토론의 귀족 험프리 2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한다.
  • 1179년 6월 10일: 마-아유(Marj Ayyun) 전투. 바니아스에서의 설욕을 위한 출전이었지만 보두앵 4세가 살라딘에 대패. 다수의 예루살렘 왕국 측 고위 인사들이 포로가 되고, 이후 몸 값을 지불하고 풀려난다.
  • 1182년: 살라딘 알레포를 수중에 넣다.
  • 1185년 3월 16일: 보두앵 4세가 지병인 한센병으로 인하여 사망. 조카인 보두앵 5세 즉위한다.
  • 1186년 8월: 보두앵 5세 사망. 보두앵 5세의 어머니인 시빌라와 그의 남편인 기 드 뤼지냥이 공동 왕으로 즉위한다.
  • 1186년: 살라딘 장기 왕조와 모술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다. 르노 드 샤티옹이 예루살렘 주변의 이슬람 순례객을 약탈하며 살라딘을 자극한다.
  • 1187년 3월 13일: 살라딘, 성전(Jihad) 선포. 르노 드 샤티옹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리라 맹세한다.
  • 1187년 7월 4일: 하틴(Hattin) 전투에서 살라딘이 승리. 르노 드 샤티옹과 기 드 뤼지냥이 포로로 잡힌다. 르노 드 샤티옹은 살라딘 앞에서 즉결 처형 당한다.
  • 1187년 9월 20일: 예루살렘 공방전 시작.
  •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 공방전 종료. 예루살렘측의 항복으로 살라딘의 승리.

역사적 배경

1174년. 누레딘이 사망하고 살라딘이 이집트 지역의 술탄으로 올라서지만,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세는 여전히 전망이 불투명하기만 했다. 누레딘이 사망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아모리 1세(Amalric I of Jerusalem)가 장기 왕조에 대한 원정 도중 사망하게 된다. 아모리 1세의 후임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 된 자는 아모리 1세의 아들인 보두앵 4세(Baldwin IV of Jerusalem)였다.

즉위 때 13세 살에 불과했던 그는,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인 한센병(나병)을 앓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의학적으로 치유가 가능한 병이지만, 중세시대의학으로는 아직 한센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보두앵 4세는 건강상의 치명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지켜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성치않은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에 나가 군사를 진두지휘 하면서 살라딘과의 일전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세는 보두앵 4세의 초인적인 열정으로 극복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이집트를 장악한 살라딘은 시리아를 손에 넣기 위하여 한발 한발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고, 예루살렘 왕국 역시 그의 시야 안에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1177년 11월 25일 항구 도시 아스칼론 근처의 몽기사르에서 충돌한다. 전투 당시 군사력은 살라딘 측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475기의 템플 기사(Knight Templar)와 수천의 보병이 전부였고, 이에 대항하는 살라딘의 군사는 2만 6천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스칼론 주변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위하여 진영을 넓게 분산시킨 살라딘의 계책이 문제가 되었다. 475기의 템플 기사단과 수 천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왕국군은 방어가 얇아진 적진 중심으로 단번에 돌격 해 들어갔고, 돌격 기세에 눌린 살라딘은 결국 중심부가 돌파 당한다. 병력이 순식간에 와해 되면서, 살라딘 마저 포로로 잡힐 뻔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전장에서 탈출한다.

몽기사르 전투

몽기사르 전투에서의 패배의 여파로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군사 작전을 당분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몽기사르 전투에서 2년이 지난 1179년이 되어서야, 살라딘은 보두앵 4세에게 설욕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1179년 4월 10일 골란 고원에 위치한 바니아스를 이동 중이던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의 소규모 군사가 충돌한다. 이 때 보두앵 4세가 사로잡힐 뻔 하지만, 수행원 중 하나인 험프리 2세(Humphrey II of Toron)의 헌신적인 희생 덕분에 자신의 본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살아돌아온 보두앵 4세는 살라딘에 대한 복수전을 천명하고, 이후 두 달 뒤인 1179년 6월 10일 군사를 출정하지만, 이번에는 몽기사르 전투 때와 달리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살라딘 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패배 당한다. 이 충돌로 인하여 예루살렘 왕국 측의 지도층 인사와 템플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사로잡혔다. 이들은 이후 몸 값을 지불하고 살라딘 측에서 풀려나지만, 템플 기사단장은 몸 값 지불을 거절하고 다마스쿠스의 감옥에서 죽는 것을 택한다.

1179년의 살라딘의 승리 이후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의 대결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는다. 살라딘에게 우선순위는 이미 기세가 한 풀 꺾였다고 판단되는 예루살렘 왕국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시리아 지역이 먼저였다. 그는 1186년까지 알레포를 장악하고, 모술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시리아 전역에 대한 세력 확대에 성공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1185년 보두앵 4세가 지병으로 사망한다.

보두앵 4세가 사망한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왕권은 조카인 보두앵 5세에게 넘어가지만,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탓이었는지, 약 1년 만에 사망하게 된다. 보두앵 5세 사망 이후, 왕권은 보두앵 4세의 누나이자, 보두앵 5세의 어머니인 시빌라(Sibylla),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기 드 뤼지냥(Guy of Lusignan)에게 이양 된다.

기 드 뤼지냥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유럽의 지원이 절실했던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 때문에 보두앵 4세에 의하여 시빌라와 정략 결혼을 하지만, 정작 기의 정치/외교적인 능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획득하였지만, 당시 예루살렘 주변에서 이슬람 순례객과 대상(Caravan)을 약탈하고 다니던 르노 드 샤티옹(Raynald of Chatillon)을 방치하였으며, 이는 이제 막 시리아의 세력을 안정화 시킨 살라딘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1187년 3월 13일, 살라딘은 시리아의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성전(Jihad)를 선포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4일 예루살렘 근처 하틴(Hattin)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을 괴멸시킨다. 약 2만에 달하던 예루살렘 왕국군 군사 중 약 3천여명만 살아서 예루살렘으로 귀환 할 수 있었다. 국왕인 기 드 뤼지냥과 전쟁의 원인이었던 르노 드 샤티옹은 살라딘에게 포로로 붙잡혀 버린다. 포로가 된 기 드 뤼지냥은 살아남아 이후 풀려나지만, 르노 드 샤티옹은 살라딘에 의해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 당한다. 이 전투에서 이벨린의 발리앙(Balian of Ibelin)이 포로가 되는 것을 겨우 면하고 살아남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큰 지도에서 하틴 전투 / Battle of Hattin 보기

예루살렘 왕국의 주력을 격파한 살라딘은 이제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다. 살라딘의 대군을 막아내기 위한 예루살렘 왕국의 지도자는 하틴에서 살아남은 발리앙, 예루살렘의 대주교 헤라클레스, 그리고 남편을 포로로 잡힌 예루살렘의 여왕 시빌라 뿐이었다.

주요 인물들

보두앵 4세(1161 ~ 1185)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의 아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친구들과 놀다 작은 생체기가 났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본 가정교사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즉시 의사에게 진찰을 한 결과 한센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다. 당시의 의술로는 한센병은 치료가 불가능했고, 때문에 그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았다. 성년이 된 이후 병이 진척되어 안면이 망가지자, 그는 은색 가면을 쓰고 정무를 처리했다.

아모리 1세가 사망한 후, 나이가 아직 어린 보두앵 4세를 대신하여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섭정통치를 하였다. 즉위 한 뒤 2년 뒤 성년이 된 보두앵 4세는 레몽 3세로 부터 전권을 다시 돌려 받았다. 어려서 부터 걸린 불치의 병 때문에 병약한 인상을 가졌을 법도 하지만, 그는 살라딘에 대항하여 매우 공세적인 입장을 취한다. 심지어 몽기사르 전투에서는 살라딘의 대군을 괴멸 시키기도 하지만, 전략적인 열세는 결국 뒤집지는 못한다.

자신의 전임들이 그러했듯, 유럽의 제후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세력 강화는 꾀하기도 하지만, 누나인 시빌라가 선택한 기 드 뤼지냥은 혼탁한 예루살렘 왕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자신의 사후 왕위 계승권에서 시빌라를 제외하고 조카인 보두앵 5세를 후임으로 지목한다.

1185년의 봄, 지병으로 인하여 짧고 화려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왕위는 보두앵 5세에게 이양되지만, 그 역시 2년도 안되어 사망하게 되고,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권은 여왕인 시빌라와, 공동 통치권자인 기 드 뤼지냥에게 넘어간다.

시빌라(1160 ~ 1190)

보두앵 4세의 누나. 후에 예루살렘의 여왕으로 등극한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족 여성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녀 역시 정략 결혼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인 기욤과 결혼을 하지만, 기욤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여 젊은 미망인이 된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상속권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데다가, 국왕인 보두앵 4세가 불치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 지위를 노리는 귀족들이 많았다고 한다.

1180년 그녀는 기 드 뤼지냥과 결혼을 한다-이 결정은 그녀의 의지도 있었다고도 한다. 보두앵 4세가 기 드 뤼지냥을 섭정으로 앉히지만, 이후 적지않은 실정으로 인하여 섭정의 자리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시빌라의 왕위 계승권도 무력화 시켜버린다.

보두앵 4세가 사망하고, 자신의 아들인 보두앵 5세도 얼마 뒤 사망하게 되자, 시빌라가 여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때, 그녀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왕위에 오르기 전에 기 드 뤼지냥이 아닌 다른 남편을 구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를 공동 왕에 추대한다.

살라딘과의 투쟁에서 결국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시빌라는 트리폴리에서 왕권을 계속 유지한다. 이후 제 3차 십자군과 함께 예루살렘 왕국의 세력권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치루던 중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기 드 뤼지냥(1159 또는 1160 ~ 1194)

시빌라의 남편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왕.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눈이 부족기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을 위기로 몰아넣는데 일조한다. 보두앵 4세에 의하여 잠시나마 섭정이 되었을 때 이슬람 대상(캐러밴: Caravan)을 공격하여 살라딘을 자극하기도 하는 바람에 보두앵 4세가 섭정의 지위를 박탈하기도 했다. 정권을 잡은 이후 하틴 전투 당시에도 전략/전술적인 판단 착오로 인하여 군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장본인이기도 하다-이 전투에서 기 본인 마저 살라딘의 포로가 되어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제 3차 십자군이 준동하고, 십자군과 함께 예루살렘 왕국을 수복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지만, 시빌라가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왕위 계승권과 관련한 분쟁에 뛰어든다. 하지만, 왕위는 결국 시빌라의 배다른 동생인 이사벨에게 넘어가게 되고, 기는 성전 기사단으로부터 구입한 사이프러스로 향하여 그곳의 영주가 된다. 이후 1194년에 후계 없이 사망하고, 그의 형제인 아모리가 사이프러스의 영주가 된다.

르노 드 샤티옹(1125 ~ 1187)

르노 드 샤티옹이 어디 출신인지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제 2차 십자군에 기사로 참가하여, 십자군이 철군 한 이후에도 안티옥에서 일하다가 1153년 안티옥의 콩스탕스와 비밀리에 결혼함으로써 안티옥 공작령을 다스렸다.

안티옥 공작령을 통치하면서부터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으며, 비잔틴 제국 황제와의 약속을 빌미로 당시 비잔틴 제국령이었던 사이프러스를 침공하여 약탈하였다. 하지만 곧 마누엘 1세 콤네누스는 안티옥으로 대군을 진군시켰고, 르노는 맨발로 벌벌 기면서 황제에게 자비를 구했다고 한다.

1160년 이슬람에 대한 약탈 행위를 자행하다 포로로 붙잡히고, 이후 7년 간 알레포에 감금되었다. 이 때에 대한 복수로 그는 살라딘에게 잡힐 때 까지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다뤘다.

보두앵 4세 치하에서 왕령을 무시하고 살라딘을 자극하는 행동을 한다. 이후 시빌라와 기가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자가 된 이후에는 더욱 고삐풀린 망아지 마냥 행동을 하며 이슬람 대상과 순례자들을 습격하자, 결국 살라딘이 자신의 손으로 르노 드 샤티옹의 목을 벨 것을 맹세하기에 이르른다.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사로잡힌 르노 드 샤티옹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을 당한다.

이벨린의 발리안(1140 ~ 1193)

이벨린 가문은 다른 십자군 귀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리 높지 않은 하급 귀족 출신이었다. 1138년 야파의 백작이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문이 왕국의 편에 섰고, 이후 반란 진압에 대한 보상으로 1141년 이벨린 성을 하사 받았다. 발리안은 이벨린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뛰어난 전략가이자 웅변가로 고급 아라비아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현지 정세에 밝았다고 전해진다. 몽기사르 전투의 승리도 사실상 그의 전략 하에 이뤄졌다고 한다. 하틴 전투 패배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이 살라딘의 군사에 장악 당하자, 살라딘에게 ‘자신의 가족을 예루살렘에서 안전한 곳으로 피난 시키기 위하여’라는 목적으로 안전을 보증하는 통행증을 발급해 달라고 요청하여 살라딘의 승락을 받아내기도 한다-이 때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단 하루만 체류할 것’을 조건으로 삼았지만, 그는 예루살렘 방어전을 선두에서 지휘하게 된다.

예루살렘 공방전 직후 벌어진 항복 협상에 합의를 하면서 예루살렘 주민들의 석방금을 내기 위하여 자신의 사재를 모두 동원하였고, 이에 감복한 살라딘의 동생이 자진하여 모자란 석방금의 일부를 대납하기도 하였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의 주인공이기도 한 인물로,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 ‘레골라스’로 유명한 올랜도 블룸(Orlando Bloom)이 이 인물 역을 맡아 연기하기도 했다.

천상 왕국의 몰락(Fall of A Kingdom of Heaven)

하틴 전투에서 돌아온 발리앙은 살라딘과의 약속을 지키려 하지만, 시빌라와 헤라클레스 주교는 그에게 예루살렘 방어전을 지휘할 것은 종용한다. 결국 떠밀리듯 방어전의 선두에 나선 발리앙이지만, 그가 방어전에서 쓸 수 있는 전투 자원은 한정적이었다. 약 3만에 가까운 살라딘의 군사에 맞서 그는 고작 14명의 기사, 소수의 무장 인원과 궁수들이 있을 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종자, 일반 시민 등 60여명을 기사로 서임한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 살라딘과 발리앙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곧 결렬되고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공성 병기들이 쉴세 없이 성벽을 공격하고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지만, 전황은 그다지 진전이 없었다. 1187년 9월 29일. 살라딘의 병사가 성벽 아래에 갱도를 파 성벽 일부를 무너트리는 데 성공하지만, 치열한 백병전 끝에 살라딘의 병사들이 진영을 물리게 된다. 이후 살라딘과 발리앙 간의 재협상이 벌어진다.

협상에서 선수를 친 것은 발리앙이었다. 그는 살라딘에게 ‘당신이 결국 예루살렘을 가지게 될 터이지만, 당신이 가질 도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기세를 제압한 발리앙은 살라딘의 반응을 살피면서 항복과 관련하여 예루살렘 시민들의 몸 값에 대한 협상을 진행한다.

도시민들의 석방 비용이 결정되고, 이에 대한 지불이 완료되기 까지 약 한달여 정도 걸린것으로 추산 된다. 석방 비용이 모자랐던 관계로 발리앙과 헤라클레스가 사비를 털어 지불하였으며, 살라딘의 동생 역시 이 비용을 지불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살라딘은 노인, 미망인, 고아에 대한 석방 비용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다. 거기에 다른 도시로 이주할 비용까지 자신의 사재에서 지급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은 살라딘에 의하여 다시 이슬람 진영으로 수복되었다. 살라딘은 로마 가톨릭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였고, 성묘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 왕국은 사실상 괴멸상태나 마찬가지였지만, 트리폴리에서 그 명맥을 유지한다.

하틴전투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로마 가톨릭 교황은 제 3차 십자군의 결성을 호소한다. 이 호소에 호응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프랑스 왕국의 존엄왕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1세가 잃어버린 성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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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사용된 캐릭터 이미지는 게임 제작 중 변경 될 수 있습니다.

Pied Pipers – 6개월 간의 기록

2010. 11. 24.

A군과 I군이 의기투합해서 인디 게임 제작 팀 결성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 함. 다들 이맘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곤 한다.

2011. 1. 4.

첫 프로토타입 제작 결정. S 프로젝트-전형적인 휴대용 기기 플랫폼을 노린 점프 액션 플랫포머.

2011. 1. 24.

사무실 임대 계약. 경기도 성남 모란에 둥지를 틀다. 원룸형 오피스 렌탈.

2011. 2. 7.

개발용 장비 구매 및 사무실 세팅 완료. 이때 돈 좀 아껴보겠다고 개발 서버를 중고 PC로 마련하는 실책을 저질렀는데, 이후 검토 때 해당 비용으로 마이크로 서버를 구매 할 수 있었다는 후문. 개발 서버 1대로 이슈트래킹 서버, 빌드 서버 등의 역할을 커버 함.

2011. 2. 8.

범용 플랫폼 엔진 개발 프로젝트 시작. 목표는 Windows PC / Mac OS / iOS 범용 사용 가능한 엔진. 외부 평가단 중 1인인 L님과 공동 개발 중.

2011. 2. 14.

카드 게임인 블랙잭을 이용한 RPG 전투 시스템 프로토타입 제작 시작. 카드와 몇 개의 코인을 이용하여 종이 프로토타입을 먼저 수행했다. 이후 프로그램으로 다시 구현-B 프로젝트로 명명.

문제의 Z 프로젝트의 세부 시스템 기획을 들어가다.

2011. 2. 21.

B 프로젝트의 첫번째 프로토타입 프로그램 릴리즈(P1). 내부 평가를 통해 외부 공개는 건너뛰고 바로 수정에 돌입 함.

2011. 2. 28.

팀 공식 웹 페이지 제작 시작. 현재 보고 계신 이 페이지가 이 때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Facebook 및 Twitter 계정 제작 및 활동 시작.

B 프로젝트 P2 버전 릴리즈. 선정된 외부 평가단에 게임이 어떤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처음 물어보다.

2011. 3. 2.

액션 플랫포머 게임인 S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 제작 시작.

2011. 3. 11.

B 프로젝트 종료. 개선 프로토타입에 대한 낮은 평가로 인한 프로젝트 중단(링크 참조).

2011. 3. 18.

기획 담당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Q 프로젝트 진행. Facebook 플랫폼을 이용한 소셜 퀴즈 게임. 기획 담당 혼자서 AMP를 보고 Facebook API를 공부해가면서 뚝딱뚝딱 버전 3까지 만들었지만 재미가 가출하는 바람에, 현재 프로젝트 잠정 종료 상태.

2011. 3. 22.

S 프로젝트 P1 릴리즈. 외부 평가 시작(링크 참조).

2011. 3. 28.

Z 프로젝트 기획 검토 및 프로토타입 제작 시작. 두 달에 걸친 악몽이 본격적으로 시작 한 때.

2011. 4. 15.

S 프로젝트 P2 릴리즈. 외부 평가에서는 호불호가 갈렸지만, 결국 내부 최종 평가에서 ‘기존의 모바일 터치 기반 플랫포머와 차별화 및 경쟁력 확보가 불가능 하다’라는 판단 하에 프로젝트 종료. 그리고 아직까지 비슷한 게임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잘 한 선택일지도.

2011. 4. 18.

R 프로젝트 시작. 심플 리얼타임 시뮬레이션-하지만 그냥 갈콘(Galcon). 프로토타입 제작에 처음으로 스타 크래프트 2(Star Craft 2)의 맵 에디터를 이용하다(링크 참조).

2011. 4. 20.

R 프로젝트 P1 릴리즈. 이후 약 4주간 P3 버전까지 릴리즈 완료하다. 잠정적으로 본 개발 진행 작품으로 선정.

2011. 5. 17.

R 프로젝트 P3 릴리즈 이후 전략 모드 시스템에 대한 프로토타입 소요가 발생하여 R 프로젝트 P4 버전에 대한 기획 작업 돌입.

2011. 6. 1.

Z 프로젝트의 첫번째 프로토타입(P1) 릴리즈. 기반 시스템 개발부터 포함하여 약 8주에 걸친 개발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암담. 결국 프로젝트 폐기 함. 프로젝트에 대한 여러가지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는 점으로 만족. 다행히 기반 시스템들은 차후의 프로토타입에 빠르게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링크 참조).

2011. 6. 13.

R 프로젝트 P4 버전 개발 작업 시작.

2011. 7. 1.

2011년 공식 여름 휴가. 2011. 7. 5. 까지.

2011. 7. 5.

R 프로젝트 P4 버전 개발 도중 내부 중간 평가에 의하여 외교 시스템 추가에 대한 의견이 확정 통과 됨. 추가 작업 돌입.

2011. 7. 29.

R 프로젝트 P4 릴리즈. 외부 평가단에 평가 버전 공개.

2011. 8. 1.

L 프로젝트 개발 진행. 웹 환경의 RPG 게임 제작 테스트.

2011. 8. 4.

R 프로젝트 P4 버전 평가에 따른 P5 버전 제작 계획 수립. 애초에 심플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이었던 프로젝트는 어느새 턴 방식 준 중형(…)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변경되어 버렸다. 기존의 전투 시스템은 폐기 되어 새롭고 단순한 형태의 전투 시스템으로 기획 변경 탑재. 현재 개발 진행 중. 하지만 7월과 8월은 휴일도 많고 예비군 훈련도 많더라는…

 

이후는 현재 진행형.

참고 1: 각 프로젝트 별 프로토타입 릴리즈 / 빌드 / 커밋 / 이슈 개수

  • B 프로젝트(2주): 릴리즈 2 회 / 빌드 54 회 / 커밋 55 회 / 45 개
  • S 프로젝트(4주): 릴리즈 2 회 / 빌드 53 회 / 커밋 120 회 / 57 개
  • Z 프로젝트(10주): 릴리즈 1 회 / 빌드 57 회 / 커밋 223 회 / 157 개
  • R 프로젝트(진행 중): 릴리즈 4 회 / 빌드 113 회 / 커밋 433 회 / 281 개

참고 2: 아이디어 및 프로토타입 진행 개수

  • 아이디어 선정 개 수: 19 개
  • 프로토타입 제작 개 수: 6 개
  • 실 제작 결정 개 수:  1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