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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 십자군 이야기(3) – 살라딘, 일어나다

제 2차 십자군과 이슬람의 반격, 그리고 – 살라딘, 일어나다

역사 연표

  • 1099년: 제 1차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
  • 1109년: 트리폴리 백작령 수립.
  • 1118년: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 사망.
  • 1144년: 장기 왕조의 장기 에데사를 함락시킨다. 십자군 국가 중 에데사 백작령 멸망.
  • 1146년: 장기 사망 아들인 누레딘이 집권.
  • 1147년: 에데사 백작령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제 2차 십자군 준동.
  • 1148년: 준동 1년 만에 제 2차 십자군 시리아 지역에서 철수.
  • 1154년: 제 2차 십자군 이후 무력화 된 다마스커스를 누레딘이 무혈 점령.
  • 1163년: 누레딘이 파티마조 지원을 위하여 시르쿠를 이집트로 파견한다. 시르쿠의 조카 살라딘이 동행한다.
  • 1169년: 살라딘의 파티마 왕조의 정권을 장악한다.
  • 1171년: 살라딘에 의하여 파티마 왕조 폐위.
  • 1174년: 누레딘의 사망. 살라딘이 카이로의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

역사적 배경

제 1차 십자군은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십자군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제 1차 십자군의 지휘관들-고드프루아, 보에몽, 레몽은 십자군이 점령한 지역들에 대한 통치 권한을 두고 서로 대립한다. 지루한 권력 암투 속에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은 고드프루아, 안티옥 백작령(Principality of Antioch)은 보에몽, 에데사 백작령(County of Edessa)은 보두앵 1세, 트리폴리 백작령(Country of Tripoli)은 레몽에게 돌아간다.

막강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개별 국가를 형성한 십자군이지만, 그들의 앞날은 마냥 행복 할 수 만은 없었다. 각 도시를 점령 할 때 저지른 약탈과 살육 때문에 그들이 점령한 도시들은 제대로 된 도시기능을 수행하기에 취약했다. 다행이 제 1차 십자군의 성공이 유럽 지역에도 전해지면서 이른바 ‘무장 순례’가 성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들로 도시의 공백을 어느 정도 매울 수는 있었다.

새로운 순례자들 덕분에 치명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긴 하였지만, 신생 십자군 국가들은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격의 기회를 활용하기에는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력은 취약하기만 하였다. 셀주크 제국은 이름만 제국이었을 뿐, 사실상 각 지방의 술탄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제국 내의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권력 획득을 위하여 신생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 전선을 펼치는 등의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이는 이슬람 내에서 종교적 신념이 달랐던 카이로(Cairo)의 파티마 왕조(Fatimids)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정체가 계속되는 와중에 변화는 이슬람 측에서 먼저 찾아왔다.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Din Zengi)가 1127년 모술을 거점으로 장기 왕조(Zengid dynasty)를 수립하면서 세력을 점차 키우고, 1144년에는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작령을 멸망시킨다. 에데사 백작령 멸망 직후 장기가 암살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자 권력은 누레딘(Nur ad-Din Zangi)에게 계승되었다. 누레딘은 시리아 주변의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는 한 편, 십자군 국가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한다.


View 제 2차 십자군 당시 정세와 십자군의 진격로/The Second Crusade in a larger map

한편, 에데사 백작령의 멸망 소식이 유럽에도 전해지자, 유럽은 로마 가톨릭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의 호소로 제 2차 십자군이 결성된다. 프랑스 왕국(Kingdom of France)의 국왕인 루이 7세(Louis VII)와 그의 왕비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황제인 콘라트 3세(Conrad III)가 중심이 된 제 2차 십자군은, 제 1차 십자군과 동일하게 육로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룸 술탄국의 강력한 저지에 의해 대패한다. 이로인하여 육로를 이용한 예루살렘 접근이 어려워지자 제 2차 십자군은 해로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에 겨우 도착한다. 성지 도착 직후, 시리아의 대도시 다마스쿠스(Damascus)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하지만, 고작 4일 만에 포위를 풀고 십자군을 해산해 버린다.

제 2차 십자군은 십자군 국가의 세력 확대는 커녕, 오히려 누레딘의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누레딘은 다마스쿠스에 대한 영향력을 천천히 키워가며 1154년 다마스쿠스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한다. 날로 영향력을 확장해가던 누레딘은 1163년 파티마 왕조의 내분에 개입하기 위하여 자신의 휘하 장군인 시르쿠(Shirkuh)를 이집트로 파견하게 되는데 이 때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딘(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Salah ad-din Yusuf ibn Ayyub)이 동행한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요 인물들

보두앵 3세(1130 ~ 1163)

성지에서 태어난 십자군의 2세대에 속하는 보두앵 3세는 1143년 부터 1163년 까지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한 왕이다. 아버지 풀크(Fulk of Jerusalem)와 어머니 멜리쟝드(Melisende)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나이 13세 때 아버지 풀크가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 멜리쟝드의 섭정으로 권력을 잡지는 못한다. 결국 1152년 성년이 된 보두앵 3세와 멜리쟝드와의 권력 분쟁에서 승리하여 왕국의 전권을 잡게 된다.

이슬람 측의 장기, 누레딘 등이 세력을 규합하며 힘을 키우는데 위협을 느끼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예루살렘 남부 지역에 눈을 돌려 가자(Gaza)를 점령하여 세력을 공고화하고,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하여 당시 비잔틴 제국 황제인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조카 테오도라 콤네네를 왕비로 들이기도 하였다.

1163년 2월 10일 베이루트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안티옥의 시리아 정교회의 암살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었다. 테오도라 콤네네와의 관계에서 자녀가 없었던 관계로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권은 동생인 아모리 1세(Amalric I of Jerusalem)에게 상속되었다.

예루살렘의 멜리쟝드(1105 ~ 1161)

예루살렘의 3대 국왕인 보두앵 2세의 장녀. 예루살렘 왕국의 세력 강화를 위하여 프랑스 귀족이었던 풀크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며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를 낳는다. 풀크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아직 어린 보두앵 3세를 대신하여 섭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한다. 문화 및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슬람과의 문화적 교류를 추진하는 등, 온건주의 노선을 걷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보두앵 3세와의 권력 분쟁을 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루이 7세(1120 ~ 1180)

제 2차 십자군의 지휘부로서 활동한 프랑스 국왕. 공명심과 신앙심이 강했던 루이 7세는 에우게니우스 3세의 호소에 왕비인 엘레오노르와 함께 군대를 조직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하지만 군사적인 역량은 부족했었는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룸 술탄령의 군대에 대패한 사실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아 횡단을 시도하다가 갖은 고초에 시달린다. 이후 육로를 포기하고 에페수스에서 해상을 이용하여 가까스로 안티옥에 도착한다.

콘라트 3세와 함께 예루살렘 도착 이후에도 별다른 군사 행동을 벌이지는 않고 근처 다마스쿠스에 대한 공략을 시도한지 4일만에 적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 하나에 철군을 해버리고, 이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낸 후, 이탈리아를 거쳐 귀국한다.

엘레오노르(1122 또는 1124 ~ 1204)

프랑스 왕국의 왕비이자 루이 7세의 아내. 아키텐(Aquitaine)과 푸아티에(Poitier) 두 곳의 광대한 영지의 상속녀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안정적인 세력 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다. 제 2차 십자군에 궁녀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기도 했던 그녀이지만, 제 2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혼은 금지되어 있었다)화 한 뒤, 노르망디 공작 헨리 2세와 재혼을 한다. 이 때 자신의 영지였던 아키텐과 푸아티에의 통치권이 헨리 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이후 헨리 2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해당 영토는 자연스럽게 잉글랜드의 영토가 되어버린다-이는 훗날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제 3차 십자군에서 사자심왕이라 불리운 리처드 1세(Richard I of England)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콘라트 3세(1093 ~1152)

슈바벤의 공작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콘라트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5세 사후 상속권의 원칙에 따라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했으나, 제후들이 상속권을 무시하고 작센 공작 로타르를 황제로 선출하자, 이에 반발하여 대립왕 되어 로타르 3세에 대항한다. 하지만 1135년에 결국 로타르 3세를 황제로 인정하고, 1137년에 황제가 사망하게 되자, 남부 독일의 제후들은 콘라트를 독일 왕(공식 칭호는 로마인의 왕: King of the Romans)으로 추대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이 준동 함에 따라 5년 동안 내전을 치루게 된다.

이후 콘라트 3세는 제 2차 십자군 제창에 호응하여 십자군에 참가하지만, 도릴레이움에서 룸 술탄령 군대에 대패(휘하 군대의 1/10만 살아 남았다고 전해진다)한 이후, 해로를 통하여 예루살렘 왕국에 당도한다. 다마스커스 공방전 이후, 비잔틴 제국에 머물다 독일 내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서둘러 귀국한다. 콘라트는 로마에서 로마 가톨릭 교황에게 정식으로 황제관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되지 못하고, 로마인의 왕 칭호만 인정 되었다.

마누엘 1세 콤네누스(1118 ~ 1180)

제 2차 십자군 전후 당시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제 1차 십자군 당시의 황제였던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손자이며, 아버지인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Johe II Komnenos)의 막내 아들이다. 아버지가 사냥 도중 사망하게 되면서, 황위를 셋째 아들인 이사키우스 대신 마누엘 1세에게 넘겼는데,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킬리키아에 있었던 마누엘 1세는 재빨리 자신의 심복을 수도로 보내 제위를 노리는 형과 삼촌을 긴급 체포하게 했고, 이후 무사히 대관식을 치룰 수 있었다.

제 2차 십자군 당시 룸 술탄국과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던 비잔틴 제국은 룸 술탄국과의 평화 협정을 맺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결국 아나톨리아로 향한 제 2차 십자군은 룸 술탄군과의 전투에서 괴멸하게 된다.

이후, 제국의 동쪽과 서쪽으로 세력 확장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말년의 전략적인 실수로 인하여,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치세를 정점으로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아나톨리아에 대한 영토 회복은 꿈꾸지 못하게 된다.

장기(1085 ~1146)

장기 왕조의 창시자인 이마드 앗-딘 장기는 이슬람 측의 십자군에 대한 조직적인 전투를 벌인 최초의 장수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 당하자 장기는 모술의 카르부가의 휘하에서 보호를 받았다. 이후, 술탄에 대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모술의 테수로 임명되고, 알레포를 근거지 삼아 세력을 키워나간다.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작령을 함락시키기도 하지만, 다마스커스 같은 셀주크 제국 내 도시들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146년 9월 숙영지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도중에 노예에게 암살당한다.

누레딘(1118 ~1174)

전체 이름은 누르 앗-딘 아부 알-카즘 마흐무드 이븐 이마드 앗-딘 장기(Nur ad-Din abu al-Qasim Mahmud ibn Imad ad-Din Zangi)으로 누레딘은 유럽 측에서 줄여부른 이름이다. 아버지인 장기로 부터 알레포 지역을 획득하였다. 뛰어난 전략적인 능력 덕분에 에데사, 안티옥 등의 영토를 대부분 점령하고, 다마스커스 지방까지 자신의 세력권 안에 넣는데 성공한다.

예루살렘 왕국의 침입을 받은 파티마 왕조가 누레딘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자신의 휘하 장군 중 하나인 시르쿠(Shirkuh)를 보내는데, 이 때 시르쿠와 함께하는 조카가 바로 살라딘(Saladin)이었다. 이후 살라딘이 파티마 왕조를 전복시키고 세력을 확대해나가자 그와 대립하게 되지만, 살라딘을 분쇄하기 위해 원정에 나선 1174년에 열병에 걸려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시르쿠(? ~ 1169)

살라딘의 백부. 1163년 누레딘의 명에 따라서 파티마 왕조의 수도 카이로로 출병하면서 자신의 조카인 살라딘을 대동한다. 파티마 왕조 내에서 장기 왕조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자신의 권력은 조카인 살라딘에게 넘어가게 된다.

살라딘(1138 ~ 1193)

전체 이름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ah ad-Din Yusuf ibn Ayyub). 살라딘은 유럽 측에서 줄여부른 이름이다. 쿠르드 족 출신의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다. 아이유브 왕조를 수립하였으며, 대표적인 십자군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을 무너트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탁월한 정치/외교 능력과 함께 전략/전술적인 감각이 탁월했던 그는, 자비로운 지배자이기도 하였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포로 처형 등의 잔혹한 방법을 선택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 제 3차 십자군의 주력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의 전쟁 중 나타난 기품있는 행동들(리처드 1세가 부상당하자 살라딘이 공격을 중단하고 그의 개인 의사를 리처드 진영에 파견하는 등)을 보여주었지만, 이는 결국 이후 살라딘과 리처드 1세 사이에서 벌어진 외교 협상에서 살라딘의 우위를 차지하는데 영향을 끼치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살라딘은 제 3차 십자군이 철군한 후 1193년에 사망한다. 그가 남긴 재산은 자신의 장례식을 치루기도 부족할 정도였으며, 이는 평소에 가진 대부분의 재화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사용하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라딘의 정권 장악

백부인 시르쿠와 함께 이집트로 향한 살라딘은 그곳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가게 되고, 시르쿠가 사망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백부의 권력을 물려받는다. 이후 파티마 왕조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가던 살라딘은 이집트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누레딘은 살라딘을 정벌하기 위해 몇 번이나 군사를 일으키지만, 명분 부족으로 인하여 결단을 주저하게 된다. 이후 1174년이 되어서 이미 손 쓸 수 없이 커버린 살라딘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지만, 진군 중 얻게되는 열병에 걸려 누레딘이 사망하게 된다.

누레딘이 사망하게 되자, 살라딘은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아이유브 왕조를 수립한다. 초기에는 파티마 왕조의 잔당 소탕을 하면서 십자군과의 충돌을 피하였으나, 시리아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시작한 살라딘과 생존을 위해 항상 몸부림치던 십자군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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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 십자군 이야기(2) – 제 1차 십자군

제 1차 십자군 – 피의 천국(The Heaven of Bloods)

역사 연표

  • 1097년 4월 26일: 제 1차 십자군 니케아에 접근
  • 1097년 6월 19일: 제 1차 십자군의 니케아 함락 성공
  • 1097년 7월 1일: 도릴레이움 전투 – 1차 십자군 승리
  • 1098년 6월 2일: 안티옥 함락
  • 1098년: 보두앵 1세, 에데사 백작령 수립
  • 1099년: 보에몽 1세, 안티옥 공작령 수립
  •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함락

역사적 배경

룸 술탄령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장점이 젊음에서 오는 패기였다면, 그의 단점 역시 젊음에서 기인한 경솔함이었다. 오합지졸 무리인 군중 십자군에게 승리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첩자들이 보내오는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주적은 유럽의 순례자 무리가 아닌 북동부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다니슈멘드 왕조였다. 선대 술탄 때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다니슈멘드는 호시탐탐 룸 술탄국으로 자신의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입장에서는 십자군보다 우선순위에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1차 십자군은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물리친 군중 십자군 같은 시골뜨기들이 아니었다. 유럽의 각 지방 영주였던 그들은 정식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예 군사를 직접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 정규군에는 중세 유럽 전투의 핵심 병력인 ‘기사(Knights)’가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다.

다수의 기사, 무장한 보병,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순례자들로 구성된 제 1차 십자군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하 로엔(Lower Lorraine)의 영주 고드프루아(Godfrey of Bouillon), 타란토(Taranto)의 공작 보에몽(Bohemond of Taranto), 툴루즈(Toulouse)의 백작 레몽 4세(Raymond IV of Toulouse)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표하여 주교 아데마르(Adhemar of Le Puy)까지 총 4인이었다(군중 십자군을 이끌었던 은자 피에르 역시 제 1차 십자군에 합류하지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클레르몽 교회회의 이후 각자의 영지에서 출발하여 하나 둘,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다. 제일 먼저 출발한 고드프루아가 1096년 12월 23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게 되며, 이후 1097년 4월.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레몽과 아데마르 주교, 보에몽이 차례로 입성한다.


큰 지도에서 제 1차 십자군의 경로/The First Crusade 보기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미묘한 환대였다. 서방에서의 지원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그였지만, 이미 군중 십자군의  난동을 경험했던 그는 제 1차 십자군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셀주크에게 빼앗긴 아나톨리아 지역을 되찾을 힘이 없었던 황제는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는 한 편, 이들 십자군 제후들을 상대로 황제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도록 압박 하였다. 충성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각 영주들은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바칠 것. 2) 황제의 가신으로써 원정 중 획득한 영토는 비잔티움에 귀속 된다. 3) 비잔틴 제국 황제의 생명과 명예를 존중하고, 그것이 침범 당하지 않도록 감시하며, 그 상태가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충성 서약에 대하여 각 영주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별 다른 주저없이 서약을 하는 영주가 있었던 반면, 이미 충성을 서약한 군주(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있는 고드프루아 같은 경우에는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지를 향하기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야 했고, 이는 비잔틴 제국의 해군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모든 십자군 참가 영주들이 알렉시오스 1세의 충성 서약서에 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이들은 하나 둘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가기 시작한다. 1097년 4월 26일, 1차 십자군은 첫번째 원정 목표인 니케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6일 니케아의 성벽에 모습을 나타낸 프랑크 인들은 그들의 신을 위한 전쟁을 이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주요 인물들

고드프루아 드 부용(1060 ~ 1100)

하 로렌 지방의 영주였던 고드프루아는 대표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파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에게 로렌 공작령의 상속권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황제를 위하여 전쟁을 벌이며 충성한 댓가로 1089년에 로렌 공작령에 대한 상속을 인정 받았다.

1096년 로마 가톨릭 교황 우르비노 2세의 십자군 준동에 호흥하여 1차 십자군에 합류하였으며, 고난 끝에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1099년에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의 초대 성묘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 – Advocate of the Holy Sepulchre)로 등극하며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지만, 얼마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단순 병사, 독살, 암살자(Assassins)에 의한 피살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전통있는 영주 가문의 출생이기도 했으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여러 전장을 누비면서 경력을 쌓으면서 부하들로부터 인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사실상 권력에 대한 욕구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던 십자군 내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수장으로 고드프루아가 추대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온화한 성품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툴루즈의 레몽 4세(1041 ~ 1105)

툴루즈의 백작 기욤 4세(William IV, Count of Toulouse)의 동생이었으나, 자신의 형이 레몽 4세의 질녀인 아키텐 공비(Philippa, Countess of Toulouse)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자 질녀의 지위를 찬탈하고 툴루즈 백작이 되었다. 이후 툴루즈를 통치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교도와 전투를 벌였고 이러한 군사적 경험 때문에 제 1차 십자군에 제일 먼저 참가하게 된다.

백전 노장에 제 1차 십자군 참전자 중 유일하게 이슬람 세력과 싸워 본 경험이 있는 레몽 4세이지만, 연륜에 맞는 인망은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였던 듯 하다.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아랫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였고, 고집불통에 권력욕까지 있어서 제 1차 십자군의 지휘부 내에서도 종종 불화를 일으키곤 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이후 벌어진 아스칼론 전투에서 고드프루아와의 다툼을 계기로 십자군을 이탈하게 되며, 이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원조를 받아 시리아 지방의 트리폴리 원정을 나서지만, 도중에 병사하게 된다.

보에몽 드 타란토(1058 ~ 1111)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 로베르토 기스카르(Robert Guiscard)의 장남인 보에몽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로 부터 부대 일부를 맡아 지휘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았다. 계모 시켈가이타(Sikelgaita)에 의해 유산 상속권에서 배제되자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다가 제 1차 십자군에에 참가하게 된다.

훤칠한 키와 미남이었다고 전해지고, 특히 이성에게 많은 호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다, 십자군 참전 직전 까지 약탈을 벌인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과거를 불문하고 충성 서약을 하는 등, 후안무치 한 면을 가진 보에몽은 그러한 성격 때문에 후세에 십자군이 벌인 만행(전쟁 중 식인에 대한 소문, 마리트 안 누만의 학살)의 주인공이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안티옥 공방전 승리 이후 안티옥을 거점으로 안티옥 공작령을 수립하나 1100년 다니슈멘드에게 포로가 되어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다. 포로에서 풀려 난 후 비잔틴 제국과 세력 다툼을 벌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1111년에 사망하게 된다.

아데마르 주교(? ~ 1098)

프랑스의 르 퓌의 주교인 아데마르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우르비노 2세가 십자군을 주창 할 때 열광적으로 호응을 한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이후 그는 교황 특사로 임명되고 로마 가톨릭 교황의 전권 대리인으로써 성지로 향하는 군대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후 제 1차 십자군에서 아데마르는 교회 측을 대표하는 지휘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직접적인 군사적인 활동은 자제하였지만,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위기에 빠진 십자군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사제직에 입문하기 전 군에 복무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 보다는 각 영주들로 구성된 제 1차 십자군의 지휘부에서 발생하는 의견 대립을 조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안티옥 함락 직후 성창(예수 그리스도 처형에 쓰인 통칭 ‘룽기누스의 창’)이 발견된 사건에 대하여 그는 성창이 가짜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문제로 인하여 이에 대해 함구하였다고 한다. 안티옥 함락 후 투르크군에 역포위 된 상태에서 이를 격파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며, 이후 발생한 십자군 지휘부의 대립을 조정하던 중 티푸스에 걸려 1098년 8월 1일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타티키오스(? ~ 1099)

비잔틴 제국의 장군. 알렉시우스 1세 의 명에 의해 제 1차 십자군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제 1차 십자군과 동행하면서 아나톨리아 – 시리아 지방이 초행인 십자군을 예루살렘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누엘 보우토미테스(1086 ~ 1112)

비잔틴 제국의 장군 니케아 공방전에서 비잔틴 제국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한다. 십자군 측 몰래 니케아 방어군과 내통하여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니케아를 비잔틴 제국령으로 복속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후일 십자군 국가들이 출현하고 보에몽, 탄크레드와 대립하면서 그들을 안티옥으로부터 몰아내는데 앞장선다.

에르겐(? ~ ?)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처. 만삭의 몸으로 니케아 방어전을 지휘한다(방어전이 계속되는 중에 결국 출산을 하지만, 다행이 순산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원래 역사 기록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안나 콤네네의 <<알렉시아드>> 에서는 스마이나의 장군 차카의 딸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니케아 함락 이후 비잔틴 제국에 투항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생애를 보낸다.

현자 다니슈멘드(? ~ 1104)

“다니슈멘드 왕의 무훈가”라는 유명한 서사시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뛰어난 장수이자 다양한 학문을 장려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아나톨리아의 북동부를 장악한 그는 세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직간접적으로 대치하였으나,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제 1차 십자군과의 회전을 치루기 위해 화평을 제안하였을 때, 이를 신사적으로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니케아를 제 1차 십자군에 빼앗긴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함께 연합 전선을 펼쳐 도릴레움(Dorylaeum) 전투를 치룬다.

니케아의 함락과 안티옥의 비극

제 1차 십자군이 니케아를 포위했을 당시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다니슈멘드와 대치중이었다. 니케아 포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다니슈멘드와의 결전도 뒤로 한 채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부랴부랴 니케아로 돌아왔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포위군을 물리치고자 몇번의 공세가 이어졌지만, 결국 젊은 술탄은 만삭인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를 눈앞에 두고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술탄이 퇴각함에 따라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사라진 니케아는 비잔틴 제국의 장수 마누엘 보우토미테스와의 밀약을 통하여 도시의 소유권을 비잔틴 황제에게 바치는 대신, 약탈과 살육은 피할 수 있었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성전(Jihad)를 선포하고 병력을 다시 재편성한다. 어제의 적이였던 다니슈멘드에게 동맹을 요청할 정도로 그는 절체절명이었다. 서방에서 다가오는 적 세력이 자신에게도 결국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한 다니슈멘드는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의 동맹에 동의한다.

1097년 7월 1일 니케아를 빠져나온 제 1차 십자군은 도릴레이움 계곡으로 향하게 된다. 가파른 협곡 지형이었던 도릴레이움에서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다니슈멘드는 십자군 부대를 기습하지만, 기사의 엄청난 위력 앞에 버티지 못하고 크게 대패하게 된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다니슈멘드는 포로가 되는 것을 면했지만, 엄청난 수의 사상자와 전리품들을 남겨둔 체 겨우 몸만 빠져나오는 신세가 된다.


큰 지도에서 제 1차 십자군 주요 전적지/The Battle Grounds of the first crusade 보기

연승이었지만 제 1차 십자군의 진격 상황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병참(Logistics)의 문제가 그들의 가장 큰 발목을 잡았다. 기본적으로 기나긴 여정에 대비한 군량은 가져오지 않았다. 병참이 원할하지 않을 때의 수단인 약탈 마저도 게릴라 전술로 돌입한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다니슈멘드의 초토화 작전에 의하여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배고픔과 황량한 산악 지형의 가혹한 기후, 거기에 룸 술탄군의 집요한 게릴라식 전술까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광신적인 신앙심으로 버틴 십자군은 보통의 경우 3개월이면 도착할 안티옥에 무려 6개월의 시간이 걸려서 도착한다.

피루즈
카르부가

안티옥 공방전은 전적으로 수비측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중세 시대의 공성전은 방비만 잘 하고 있다면 수성측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데다가, 안티옥은 원군을 기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십자군 전력은 안티옥에 오는 동안 계속적으로 적에게 시달렸고, 보급이 원할하지 않아 사기 역시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상황을 역전 시킨 것은 투르크 제국의 내부 분열에 있었다. 안티옥의 피루즈(Firouz)가 전시 암거래로 처벌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배신 행위(자신의 담당 성벽을 십자군 지휘관 중 하나인 보에몽에게 넘겨버렸다)를 저지르는 바람에 8개월이나 수성하고 있었던 안티옥은 하루 아침에 십자군에 의해 점령된다. 게다가 원군으로 온 카르부가(Kerbogha)의 부대는 안티옥을 막 점령한 십자군을 역으로 포위하는데 성공하지만, 휘하 장수들이 총대장을 배신하고 전선을 무단 이탈하는 바람에 ‘성창 발견’으로 사기가 오른 십자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한다.

안티옥이 십자군에 넘어간 직후 안티옥은 십자군이 벌이는 살육과 약탈로 인하여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수만에 달하는 민간인 희생자가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광기는 이후 ‘마라트 알 누만의 참극'(마라트 알 누만이라는 마을을 십자군 병사들이 약탈 및 방화 후, 마을 주민들을 잡아먹어버린 사건)을 넘어 예루살렘 공성전에 까지 이어진다.

예루살렘 공성전, 그리고 십자군 국가의 성립

안티옥의 점령 이후, 제 1차 십자군 지휘관 중 하나인 아데마르 주교가 질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지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진격을 멈추지 않는다. 1099년 6월 7일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은 곧바로 공성전 준비에 들어간다. 각종 공성 병기를 활용하는 등 준비를 갖춘 모습을 보이고, 이에 맞서는 파티마 왕조의 방어군도 수류탄 병기인 ‘그리스의 불’을 적극 활용 하면서 치열하게 방어에 나서지만 공성전이 벌어지고 약 한 달여가 지난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의 성벽이 십자군에 의해 점령 당하면서 전투가 마무리되게 된다. 예루살렘 공성전 역시 십자군에 의한 이교도 숙청이 일어났다. 십자군은 사원으로 피신해있던 여성, 어린이 들을 가둬둔 채 불을 질러 한꺼번에 죽이는가 하면, 닥치는 대로 타 종교의 사람들(여기에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포함되었다)을 죽이는 바람에 사람들의 피로 발목을 적실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살육은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이뤄졌다.

전쟁이 끝나고, 제 1차 십자군이 진군한 자리에는 이른바 ‘십자군 국가’들이 성립되었다. 제 1차 십자군에 참전한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은 나라들이 들어서게 된다.


큰 지도에서 십자군 국가(1099) 보기

  • 예루살렘 왕국 – 고드프루아 드 부용
  • 안티옥 공작령 – 보에몽 드 타란토
  • 에데사 백작령 – 보두앵 1세

십자군 국가 성립 이후에도 십자군의 지휘부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좀 더 확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때문에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상태였지만, 이슬람 측이 이를 재탈환의 기회로 삼지 못한 것은 그들 역시 기나긴 권력 투쟁으로 인하여, 하나로 합쳐 저항해야 할 구심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반세기가 지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 Saladin)이 나타나기까지 계속 된다.

한편 제 1차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유럽에도 전해지게 되고, 이는 대중과 제 1차 십자군 때에는 미동도 하지않던 각 국가의 왕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성지 순례라는 미명 아래, 천국에 발을 들이기 위해 이교도를 처단하겠다는 광적인 들불이 점차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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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 십자군 이야기(1) – 신의 뜻대로!(Deus vult!)

아미 앤 스트레테지는 중세 십자군을 배경으로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게임 상에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십자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위하여 개발 참고 자료로 정리 중인 역사적인 부분에 대한 내용을 재구성하여 하나씩 연재 하겠습니다.

신의 뜻대로!(Deus vult!) – 클레르몽 교회회의와 군중 십자군의 출현

역사 연표

  • 1095년 11월 27일: 로마 가톨릭 교황 우르비노 2세가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비잔틴 제국 지원 및 성지 탈환을 주장한다.
  • 1096년: 군중 십자군 준동한다. 은자 피에르의 선도로 성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한다.
  • 1096년 10월 26일: 룸 술탄령의 클르츠 아르슬란 1세, 군중 십자군을 요격하는데 성공한다.

역사적 배경

클레르몽 교회회의

기원 후 1095년 11월 18일, 로마 가톨릭의 교황인 우르비노 2세(Pope Urban II)와 전 유럽의 로마 가톨릭 평신도를 대표하는 약 300명의 성직자들이 프랑스의 작은 도시 클레르몽에 모여들었다.  이른바 클레르몽 교회회의(Council of Clermont)라 불리운 이 회동이 절정에 이르른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비노 2세는 연설을 통하여 이슬람 세력에 위협을 받던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을 이교도로 부터의 위협에서 구해내고, 이교도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는 성지 예루살렘(Holy Land Jerusalem)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에 군중들은 ‘신의 뜻대로!(Deus vult! – God wills it!’)라고 외치고 소리치며 열정적으로 화답했다.

교황의 연설에 가장 먼저 호응을 한 것은 유럽의 황제, 왕, 혹은 지방의 봉건 제후들이 아닌, 은자 피에르(Peter the Hermit)와 기사 고티에 생자부아(Walter Sans Avoir)를 중심으로 순진하고 신실한 순례자들, 신의 가호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던 빈민들, 그리고 자신의 부와 영광을 위해 신의 원정길에 오른 시골 기사, 용병들로 구성된 군중 십자군(People’s Crusade)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성지  탈환과 순례를 목적으로 출발한 군중 십자군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의 무리였다. 그들은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의 위치조차 몰라서 그저 동쪽으로 진군했다. 군중 십자군은 규율이나 체계적인 규범을 갖춘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을 지나면서 ‘신의 뜻대로’ 약탈, 방화, 살인 등의 범죄를 서슴없이 저렀으며 때문에 해당 지방의 군대에 의해 강제 진압을 당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군중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도착하였을 때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Alexios I Komnenos)는 이들이 제국 수도에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측의 영지로 서둘러 보내버렸다.


큰 지도에서 군중 십자군의 경로/The Route of the People’s Crusade 보기

한편, 아나톨리아(Anatolia – 지금의 터키)를 지배하는 자는 이슬람 국가인 룸 술탄령(Sultanate of Rum)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Kilij Arslan I)였다. 그는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룸 술탄령의 권좌를 차지한 야심 많은 소년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보 제공자들을 통하여 군중 십자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나이는 아직 17세 밖에 되질 않았다.

그는 서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무리의 순례객이 자신의 세력을 위험하게 만들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나톨리아의 북동쪽 지역에서 세력을 굳히고 있었던 현자 다니슈멘드(Ghazi ibn Danishmend)는 호시탐탐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지배하고 있던 룸 술탄령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현실적인 위험은 다니슈멘드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넌 군중 십자군의 행동은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생각을 바꿔놓게 만들었다. 오합지졸에 숫자만 많은 것으로 보였던 그들은 니코메디아에 도착한 이후 수시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다녔으며 룸 술탄령의 부속 도시들에도 조금씩 야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096년 9월 중순, 군중 십자군이 룸 술탄령의 수도 니케아(Nicaea)에 접근하기 시작하자, 젊은 술탄은 칼을 빼들고 그들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한다.

주요 인물들

은자 피에르(? ~ 1115)

선동꾼이자 광신도인 은자 피에르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교황 우르비노 2세에 의해 십자군 선포가 일어나기 전 부터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그는 성 베드로(St. Peter)가 자신의 꿈에 나타나, 성지 탈환이야 말로 신의 뜻이며 이를 이루기 위해 움직이라 하였다 주장했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성지 탈환이 선언 된 이후, 그는 고티에 생자부아 등과 함께, 가난한 기사, 한탕을 노린 용병, 무지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모아 군중 십자군을 결성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전형적인 선동꾼에 무책임한 리더십을 가진 그는 각지에서 트러블을 일으켜, 그를 따른 수많은 순례자들을 그들이 원하던 천국으로 이끌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남기면서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였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로 인해 군중 십자군이 사실상 괴멸한 이후 제 1차 십자군에 합류하게 된다.

고티에 생자부아(? ~ 1096)

프랑스 북부 출신의 작은 영지의 기사였던 고티에 생자부아는 군중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은자 피에르와는 1096년 4월 쾰른에서 합류하였다. 하지만 합류 직후, 시간을 끄는 은자 피에르를 뒤로 하고 성급한 일부 순례자들과 함께 성지로 출발하였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헝가리 왕국을 횡단하였으나, 베오그라드에서의 소속 부대원 일부와 순례자들의 약탈 행위로 인하여 보복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1096년 7월 20일 뒤따라온 은자 피에르의 본대와 콘스탄티노플에서 합류하였으며, 비잔틴 제국 군대의 호위 속에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게 된다. 이후 룸 술탄군과의 교전에서 군중 십자군이 괴멸 할 때 전사한다.

비록 군중 십자군을 이끌면서 잦은 사고와 피해를 입기도 하였지만, 오합지졸의 집단을 이끌고 유럽 대륙을 횡단한 그의 능력은 인정 할 만 했다. 때문에 훗날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은 그를 명예, 용기, 겸손 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추앙하기도 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1056 ~ 1118)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계산적이고 술수에 능한 사람이었다. 투르크 민족 중흥으로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무슬림에게 빼앗기기는 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제국령이었던 이 땅을 되찾기 위하여 외세의 도움을 얻는 것 역시 주저하지 않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적을 적의 적으로 물리침)에 능하여 비잔틴 제국에 침략한 여러 외부 세력들을 막아내었다. 즉위 직후 노르만족의 침공에 대항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신성로마제국에 요청하여 이 침략을 막아내었으며, 중앙 아시아 지역의 페체네그 족의 침략에도 다른 야만족인 쿠만 족과 동맹을 통하여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수장인 우르비노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슬람 세력으로 부터 비잔틴 제국을 구해달라고 한 것 역시 알렉시오스 1세이며, 이후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한 십자군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한다-하지만 대부분 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안나 콤네네(1083 ~ 1151)

비잔틴 제국의 황녀, 알렉시오스 1세와 유력귀족 두카스 가문 출신의 황후 이레네 두카이나(Irene Doukaina)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이다. 종교, 역사, 문학, 철학 등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1118년에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타계한 이후, 자신의 남편을 비잔티움 황제에 즉위 시키려 하지만 실패하고 케카리토메네 수녀원에 유폐된 이후 역사서인 «알렉시아드(Alexiad)»를 집필하게 된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1080 ~ 1107)

어린 나이에 술탄의 자리에 오른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젊은 혈기와 당돌함으로 권모술수가 판치는 대 셀주크 제국의 술탄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룸 술탄령을 세운 아버지 술탄 술레이만이 1086년 사망하고 이후 말리크 샤의 가신으로 사실상의 포로 생활을 하였으나, 1092년 말리크 샤가 사망하자 룸 술탄령의 수도인 니케아로 돌아가 세력을 되찾았다. 이 때가 그의 나이 13세였다. 이후 룸 술탄령을 통치하면서 군중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권모술수와 암투가 난무했던 셀주크의 왕실에서 살아남은 킬리지 아르슬란이지만, 군중 십자군과의 전투에서의 승리에 심취한 나머지, 곧 이어진 제 1차 십자군의 공세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이후 수 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세력을 동쪽으로 계속 확장, 1107년 모술(Mosul)을 점령하기도 하지만 대 셀주크 제국의 메메드 1세(Mehmed I)의 지원을 받은 오르토키드(Ortoqids)와 리드완(Fakhr al-Mulk Radwan)의 반격으로 카부르 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망치는 도중 사망하게 된다.

결과

은자 피에르가 이끌던 군중 십자군은 종교적 광기와 집념이 뭉쳐진 거대한 집단이었지만, 무질서한 불한당 무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정규군 앞에 맥없이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니코메디아 공방전에서 괴멸적으로 패배한 군중 십자군의 대다수의 순례자들은 사망하거나, 살아남은 자들도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갔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지나가는 한줄기 산들바람과 같은 존재였다. 은자 피에르가 전장에서 빠져나와 겨우 콘스탄티노플에 몸을 피신하였을 때, 실질적인 첫번째 십자군이 이제 막 제국 수도에 도착하고 있었다. 중갑으로 무장하고 장창을 장비한체 말을 타고 돌격하는 ‘기사(Kights)’가 전투의 중심이었던 중세 유럽의 최고 전투 집단이 이제 막 한숨 돌린 아나톨리아에 공포와 절망을 안겨 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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