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 십자군 이야기(6) – 콘스탄티노플 함락

제 4차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의 몰락

역사 연표

  • 1195년: 이사키오스 2세(Issac II), 자신의 형인 알렉시오스 3세(Alexios III)에게 황위를 찬탈당한다.
  • 1198년: 로마 카톨릭 교황에 인노첸시오 3세(Innocent III)가 취임하다. 교황은 네번째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다.
  • 1201년: 각국의 영주들이 모여 십자군 결성을 확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군수 계약을 맺는다.
  • 1202년 10월 8일: 십자군의 저조한 참여율로 인하여 계약이 파기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십자군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같은 로마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 왕국의 도시 차라(Zara)를 공격한다. 이에 교황은 십자군 전원을 파문에 처한다.
  • 1203년 4월: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Alexios IV)가 십자군을 찾아간다. 알렉시오스 3세를 비잔틴 제국에서 몰아내 줄 것을 요청.
  • 1203년 6월 24일: 십자군을 태운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다. 이후 약 한달여간 공방전이 펼쳐지고,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승리한다.
  • 1204년 4월 9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시민 폭동 발생.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가 살해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비잔틴 제국에 개입.
  • 1204년 5월 12일: 비잔틴 제국의 몰락.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라틴 제국을 건설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Baldwin I of Constantinople)를 초대 황제로 추대한다.

역사적 배경

제 3차 십자군 이후 1200 년대 초의 중세 유럽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잉글랜드 왕국은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사후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에 빠져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역시 내전에 휩싸여있는 상태였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던 아이유브 왕조 역시 살라딘 사후 정권 획득을 위한 정치적인 혼란에 빠져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점차 혼란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황인 인노첸시오 3세는  1198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 새로운 십자군의 결성을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에 응한 것은 제 3차 십자군 때와 달리, 유력 국가의 국왕이 아닌 지방 영주들이었다. 영주들과 기사들이 중심이 되었던 십자군이었던 제 1차 십자군의 성공을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이 이번 십자군에 대한 기대를 품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결성된 제 4차 십자군은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해로를 이용하여 성지에 도착할 계획을 수립한다. 일개 영주들이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거래를 통하여 성지까지 이동할 함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제 4차 십자군과의 계약을 수락하였다.

  • 33,500명의 사람과 4,500마리의 말을 이집트로 수송한다.
  • 인원 및 군마에 대한 1년치 식량을 베네치아 공화국이 준비한다.
  • 제 4차 십자군은 이에 대한 비용으로 총 8만 5천 마르크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지급한다.

하지만, 이 계약은 곧 틀어지게 되었는데, 제 4차 십자군에 참전을 한 총 인원이 예상 인원을 훨씬 밑도는 1만 여명에 불과했고,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지급해야 할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측에서도 미지급 비용 부분에 대한 할인에 난색을 표했는데, 이미 제 4차 십자군과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큰 지도에서 베네치아와 차라 / Venezia and Zara 보기

결국 대안으로 결정된 사항은 당시 헝가리 왕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도시인 차라(Zara)에 대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협동 공성이었다. 아드리아 해에 연안 위치한 차라는 베네치아의 해상 무역로 확보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배네치아 공화국의 세력권에 넣어야 할 요충지였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모두가 찬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헝가리 왕국은 십자군과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국가였고, 때문에 같은 종교를 가진 국가의 도시를 십자군이 공격한다는 것에 대하여 주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Doge: 국가 원수)였던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의 협상력에 굴복하여 십자군 역시 차라 공방전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공방전이 벌어진 1주일 만에 차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십자군이 같은 로마 카톨릭 국가의 도시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분노하여 십자군 전체를 파문에 처해버렸다. 당황한 십자군 지도자들은 교황에게 사죄를 하고 곧 파문은 해제되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파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에 이득이 되는 일을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차라를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잔틴 제국의 망명 황자인 알렉시오스 4세가 지도부를 방문한다. 그는 십자군이 현재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키우스 2세를 복위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하여 거사 성공 시 20만 마르크의 군자금, 비잔틴 제국군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십자군에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관할로 주겠다고 제안하게 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수송 선단을 아드리아 해에 띄우게 된다.

주요 인물들

엔리코 단돌로(1107? ~ 1205)

베네치아 공화국을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외교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비잔틴 제국과의 강화협상을 하기도 하였고, 시칠리아에 베네치아 대사로 2회나 파견되기도 하였다.  엔리코 단돌로는 1193년 1월 1일 베네치아의 제 39대 도제(Doge: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는데, 이미 고령에 시력의 대부분을 잃었으나,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고 한다.

제 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접근해 왔을때, 그는 뛰어난 외교적인 수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익을 증강 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십자군에 의한 차라(Zara) 공격과 이후 콘스탄티노플 공방은 사실상 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 무역에 있어서 다른 무역 도시 국가(제노바, 피사 등)에 비하여 월등히 높은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라틴 제국이 성립 된 이후, 병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소피아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보두앵 1세(1172 ~1205)

플랑드르와 에노의 백작인 보두앵 1세는 제 4차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비잔틴 제국 침략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시킨 후, 괴뢰 정부인 라틴 제국을 설립 할 때 초대 황제로 옹립된다.

보두앵 1세는 라틴 제국의 황제로 등극 한 이후 비잔틴 제국의 전통을 폐기하고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비슷한 제도를 만들어 기사들과 제후들에게 봉토로 나누어주었다. 라틴 제국 건립 이후 비잔틴 재건 세력의 반란과 함께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인 칼로얀이 공격해오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하여 분투하나, 1205년 불가리아군에 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4세(1182 ~ 1204)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로, 자신의 큰아버지인 알렉시오스 3세가 쿠테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하자, 비잔틴 제국을 빠져나와 신성로마제국에 의탁하게 된다. 이후 제 4차 십자군이 차라를 점령하자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한다.

제 4차 십자군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되었을 때, 유폐되어 있던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오르게 되지만, 정치/외교적으로 무리한 결정을 내린 가운데 시민 폭동으로 인하여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3세(1153 ~ 1211)

이사키오스 2세의 형. 이사키오스 2세가 불가리아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1195년 4월, 쿠데타에 성공하여 동생의 황위를 빼앗는다. 하지만 권력 욕심에 비하여 통지 능력은 무능했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경제난은 점차 심각해졌으며, 때문에 발칸 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감소하였다.

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할 때, 그는 막대한 재산을 챙겨 트라키아로 도망쳤다. 이후 망명지에서 자신의 권력을 찾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211년에 유폐 당한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사키오스 2세(1156 ~1204)

이사키오스는 아나톨리아의 군사귀족 가문 출신으로 본래 황가와는 먼 친척관계였다. 그는 황제인 안드로니쿠스 1세가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비운 사이에 시민 반란을 주도하여 그들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제국의 영토는 점차 축소되어 갔으며, 군사력 역시 조선업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맡기는 결정을 함으로써 해군력 약화를 초래하였다. 내정에서는 부정부패를 조장하기도 하는 등, 제국의 몰락의 단초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의의는 점차 퇴색되어만가고…

1203년 6월 24일 십자군 병력을 실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3중 성벽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제국의 수도였지만, 당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3세는 무능했고, 제국군의 군사력도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약 한 달여의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게 함락된다.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4세와의 약속대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이사키오스 2세를 다시 제위에 앉히고 알렉시오스 4세 역시 공동 황제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과 밀약한 군사 원조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영향권에 둔다고 하는 약속 또한 동방 정교를 믿고 있었던 시민들의 맹렬한 반발만 불러왔을 뿐이었다. 결국 십자군에 지급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올린 세금으로 인하여 1204년 시민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 모두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폭동을 빌미로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공격한다. 1204년 4월 9일 감행 된 총 공격으로 인하여 수많은 문화제, 보물등이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하여 약탈 당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여 지방 곳곳에 망명 정부들이 들어서게 되고,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새로운 비잔틴 제국-라틴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황은 같은 카톨릭계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를 공격한 일에 탐탁치는 않았으나, 이를 승인 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사실상 제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무리 되어버렸다.

비잔틴 제국의 망명 정권은 다음과 같다.

  • 니케아 제국 – 훗날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하여 비잔틴 제국을 재건한다
  • 에페이로스 공국
  • 트레비존드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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