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 십자군 이야기(3) – 살라딘, 일어나다

제 2차 십자군과 이슬람의 반격, 그리고 – 살라딘, 일어나다

역사 연표

  • 1099년: 제 1차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
  • 1109년: 트리폴리 백작령 수립.
  • 1118년: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 사망.
  • 1144년: 장기 왕조의 장기 에데사를 함락시킨다. 십자군 국가 중 에데사 백작령 멸망.
  • 1146년: 장기 사망 아들인 누레딘이 집권.
  • 1147년: 에데사 백작령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제 2차 십자군 준동.
  • 1148년: 준동 1년 만에 제 2차 십자군 시리아 지역에서 철수.
  • 1154년: 제 2차 십자군 이후 무력화 된 다마스커스를 누레딘이 무혈 점령.
  • 1163년: 누레딘이 파티마조 지원을 위하여 시르쿠를 이집트로 파견한다. 시르쿠의 조카 살라딘이 동행한다.
  • 1169년: 살라딘의 파티마 왕조의 정권을 장악한다.
  • 1171년: 살라딘에 의하여 파티마 왕조 폐위.
  • 1174년: 누레딘의 사망. 살라딘이 카이로의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

역사적 배경

제 1차 십자군은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십자군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제 1차 십자군의 지휘관들-고드프루아, 보에몽, 레몽은 십자군이 점령한 지역들에 대한 통치 권한을 두고 서로 대립한다. 지루한 권력 암투 속에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은 고드프루아, 안티옥 백작령(Principality of Antioch)은 보에몽, 에데사 백작령(County of Edessa)은 보두앵 1세, 트리폴리 백작령(Country of Tripoli)은 레몽에게 돌아간다.

막강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개별 국가를 형성한 십자군이지만, 그들의 앞날은 마냥 행복 할 수 만은 없었다. 각 도시를 점령 할 때 저지른 약탈과 살육 때문에 그들이 점령한 도시들은 제대로 된 도시기능을 수행하기에 취약했다. 다행이 제 1차 십자군의 성공이 유럽 지역에도 전해지면서 이른바 ‘무장 순례’가 성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들로 도시의 공백을 어느 정도 매울 수는 있었다.

새로운 순례자들 덕분에 치명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긴 하였지만, 신생 십자군 국가들은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격의 기회를 활용하기에는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력은 취약하기만 하였다. 셀주크 제국은 이름만 제국이었을 뿐, 사실상 각 지방의 술탄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제국 내의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권력 획득을 위하여 신생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 전선을 펼치는 등의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이는 이슬람 내에서 종교적 신념이 달랐던 카이로(Cairo)의 파티마 왕조(Fatimids)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정체가 계속되는 와중에 변화는 이슬람 측에서 먼저 찾아왔다.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Din Zengi)가 1127년 모술을 거점으로 장기 왕조(Zengid dynasty)를 수립하면서 세력을 점차 키우고, 1144년에는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작령을 멸망시킨다. 에데사 백작령 멸망 직후 장기가 암살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자 권력은 누레딘(Nur ad-Din Zangi)에게 계승되었다. 누레딘은 시리아 주변의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는 한 편, 십자군 국가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한다.


View 제 2차 십자군 당시 정세와 십자군의 진격로/The Second Crusade in a larger map

한편, 에데사 백작령의 멸망 소식이 유럽에도 전해지자, 유럽은 로마 가톨릭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의 호소로 제 2차 십자군이 결성된다. 프랑스 왕국(Kingdom of France)의 국왕인 루이 7세(Louis VII)와 그의 왕비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황제인 콘라트 3세(Conrad III)가 중심이 된 제 2차 십자군은, 제 1차 십자군과 동일하게 육로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룸 술탄국의 강력한 저지에 의해 대패한다. 이로인하여 육로를 이용한 예루살렘 접근이 어려워지자 제 2차 십자군은 해로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에 겨우 도착한다. 성지 도착 직후, 시리아의 대도시 다마스쿠스(Damascus)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하지만, 고작 4일 만에 포위를 풀고 십자군을 해산해 버린다.

제 2차 십자군은 십자군 국가의 세력 확대는 커녕, 오히려 누레딘의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누레딘은 다마스쿠스에 대한 영향력을 천천히 키워가며 1154년 다마스쿠스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한다. 날로 영향력을 확장해가던 누레딘은 1163년 파티마 왕조의 내분에 개입하기 위하여 자신의 휘하 장군인 시르쿠(Shirkuh)를 이집트로 파견하게 되는데 이 때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딘(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Salah ad-din Yusuf ibn Ayyub)이 동행한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요 인물들

보두앵 3세(1130 ~ 1163)

성지에서 태어난 십자군의 2세대에 속하는 보두앵 3세는 1143년 부터 1163년 까지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한 왕이다. 아버지 풀크(Fulk of Jerusalem)와 어머니 멜리쟝드(Melisende)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나이 13세 때 아버지 풀크가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 멜리쟝드의 섭정으로 권력을 잡지는 못한다. 결국 1152년 성년이 된 보두앵 3세와 멜리쟝드와의 권력 분쟁에서 승리하여 왕국의 전권을 잡게 된다.

이슬람 측의 장기, 누레딘 등이 세력을 규합하며 힘을 키우는데 위협을 느끼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예루살렘 남부 지역에 눈을 돌려 가자(Gaza)를 점령하여 세력을 공고화하고,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하여 당시 비잔틴 제국 황제인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조카 테오도라 콤네네를 왕비로 들이기도 하였다.

1163년 2월 10일 베이루트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안티옥의 시리아 정교회의 암살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었다. 테오도라 콤네네와의 관계에서 자녀가 없었던 관계로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권은 동생인 아모리 1세(Amalric I of Jerusalem)에게 상속되었다.

예루살렘의 멜리쟝드(1105 ~ 1161)

예루살렘의 3대 국왕인 보두앵 2세의 장녀. 예루살렘 왕국의 세력 강화를 위하여 프랑스 귀족이었던 풀크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며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를 낳는다. 풀크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아직 어린 보두앵 3세를 대신하여 섭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한다. 문화 및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슬람과의 문화적 교류를 추진하는 등, 온건주의 노선을 걷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보두앵 3세와의 권력 분쟁을 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루이 7세(1120 ~ 1180)

제 2차 십자군의 지휘부로서 활동한 프랑스 국왕. 공명심과 신앙심이 강했던 루이 7세는 에우게니우스 3세의 호소에 왕비인 엘레오노르와 함께 군대를 조직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하지만 군사적인 역량은 부족했었는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룸 술탄령의 군대에 대패한 사실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아 횡단을 시도하다가 갖은 고초에 시달린다. 이후 육로를 포기하고 에페수스에서 해상을 이용하여 가까스로 안티옥에 도착한다.

콘라트 3세와 함께 예루살렘 도착 이후에도 별다른 군사 행동을 벌이지는 않고 근처 다마스쿠스에 대한 공략을 시도한지 4일만에 적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 하나에 철군을 해버리고, 이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낸 후, 이탈리아를 거쳐 귀국한다.

엘레오노르(1122 또는 1124 ~ 1204)

프랑스 왕국의 왕비이자 루이 7세의 아내. 아키텐(Aquitaine)과 푸아티에(Poitier) 두 곳의 광대한 영지의 상속녀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안정적인 세력 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다. 제 2차 십자군에 궁녀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기도 했던 그녀이지만, 제 2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혼은 금지되어 있었다)화 한 뒤, 노르망디 공작 헨리 2세와 재혼을 한다. 이 때 자신의 영지였던 아키텐과 푸아티에의 통치권이 헨리 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이후 헨리 2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해당 영토는 자연스럽게 잉글랜드의 영토가 되어버린다-이는 훗날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제 3차 십자군에서 사자심왕이라 불리운 리처드 1세(Richard I of England)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콘라트 3세(1093 ~1152)

슈바벤의 공작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콘라트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5세 사후 상속권의 원칙에 따라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했으나, 제후들이 상속권을 무시하고 작센 공작 로타르를 황제로 선출하자, 이에 반발하여 대립왕 되어 로타르 3세에 대항한다. 하지만 1135년에 결국 로타르 3세를 황제로 인정하고, 1137년에 황제가 사망하게 되자, 남부 독일의 제후들은 콘라트를 독일 왕(공식 칭호는 로마인의 왕: King of the Romans)으로 추대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이 준동 함에 따라 5년 동안 내전을 치루게 된다.

이후 콘라트 3세는 제 2차 십자군 제창에 호응하여 십자군에 참가하지만, 도릴레이움에서 룸 술탄령 군대에 대패(휘하 군대의 1/10만 살아 남았다고 전해진다)한 이후, 해로를 통하여 예루살렘 왕국에 당도한다. 다마스커스 공방전 이후, 비잔틴 제국에 머물다 독일 내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서둘러 귀국한다. 콘라트는 로마에서 로마 가톨릭 교황에게 정식으로 황제관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되지 못하고, 로마인의 왕 칭호만 인정 되었다.

마누엘 1세 콤네누스(1118 ~ 1180)

제 2차 십자군 전후 당시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제 1차 십자군 당시의 황제였던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손자이며, 아버지인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Johe II Komnenos)의 막내 아들이다. 아버지가 사냥 도중 사망하게 되면서, 황위를 셋째 아들인 이사키우스 대신 마누엘 1세에게 넘겼는데,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킬리키아에 있었던 마누엘 1세는 재빨리 자신의 심복을 수도로 보내 제위를 노리는 형과 삼촌을 긴급 체포하게 했고, 이후 무사히 대관식을 치룰 수 있었다.

제 2차 십자군 당시 룸 술탄국과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던 비잔틴 제국은 룸 술탄국과의 평화 협정을 맺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결국 아나톨리아로 향한 제 2차 십자군은 룸 술탄군과의 전투에서 괴멸하게 된다.

이후, 제국의 동쪽과 서쪽으로 세력 확장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말년의 전략적인 실수로 인하여,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치세를 정점으로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아나톨리아에 대한 영토 회복은 꿈꾸지 못하게 된다.

장기(1085 ~1146)

장기 왕조의 창시자인 이마드 앗-딘 장기는 이슬람 측의 십자군에 대한 조직적인 전투를 벌인 최초의 장수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 당하자 장기는 모술의 카르부가의 휘하에서 보호를 받았다. 이후, 술탄에 대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모술의 테수로 임명되고, 알레포를 근거지 삼아 세력을 키워나간다.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작령을 함락시키기도 하지만, 다마스커스 같은 셀주크 제국 내 도시들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146년 9월 숙영지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도중에 노예에게 암살당한다.

누레딘(1118 ~1174)

전체 이름은 누르 앗-딘 아부 알-카즘 마흐무드 이븐 이마드 앗-딘 장기(Nur ad-Din abu al-Qasim Mahmud ibn Imad ad-Din Zangi)으로 누레딘은 유럽 측에서 줄여부른 이름이다. 아버지인 장기로 부터 알레포 지역을 획득하였다. 뛰어난 전략적인 능력 덕분에 에데사, 안티옥 등의 영토를 대부분 점령하고, 다마스커스 지방까지 자신의 세력권 안에 넣는데 성공한다.

예루살렘 왕국의 침입을 받은 파티마 왕조가 누레딘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자신의 휘하 장군 중 하나인 시르쿠(Shirkuh)를 보내는데, 이 때 시르쿠와 함께하는 조카가 바로 살라딘(Saladin)이었다. 이후 살라딘이 파티마 왕조를 전복시키고 세력을 확대해나가자 그와 대립하게 되지만, 살라딘을 분쇄하기 위해 원정에 나선 1174년에 열병에 걸려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시르쿠(? ~ 1169)

살라딘의 백부. 1163년 누레딘의 명에 따라서 파티마 왕조의 수도 카이로로 출병하면서 자신의 조카인 살라딘을 대동한다. 파티마 왕조 내에서 장기 왕조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자신의 권력은 조카인 살라딘에게 넘어가게 된다.

살라딘(1138 ~ 1193)

전체 이름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ah ad-Din Yusuf ibn Ayyub). 살라딘은 유럽 측에서 줄여부른 이름이다. 쿠르드 족 출신의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다. 아이유브 왕조를 수립하였으며, 대표적인 십자군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을 무너트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탁월한 정치/외교 능력과 함께 전략/전술적인 감각이 탁월했던 그는, 자비로운 지배자이기도 하였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포로 처형 등의 잔혹한 방법을 선택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 제 3차 십자군의 주력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의 전쟁 중 나타난 기품있는 행동들(리처드 1세가 부상당하자 살라딘이 공격을 중단하고 그의 개인 의사를 리처드 진영에 파견하는 등)을 보여주었지만, 이는 결국 이후 살라딘과 리처드 1세 사이에서 벌어진 외교 협상에서 살라딘의 우위를 차지하는데 영향을 끼치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살라딘은 제 3차 십자군이 철군한 후 1193년에 사망한다. 그가 남긴 재산은 자신의 장례식을 치루기도 부족할 정도였으며, 이는 평소에 가진 대부분의 재화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사용하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라딘의 정권 장악

백부인 시르쿠와 함께 이집트로 향한 살라딘은 그곳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가게 되고, 시르쿠가 사망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백부의 권력을 물려받는다. 이후 파티마 왕조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가던 살라딘은 이집트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누레딘은 살라딘을 정벌하기 위해 몇 번이나 군사를 일으키지만, 명분 부족으로 인하여 결단을 주저하게 된다. 이후 1174년이 되어서 이미 손 쓸 수 없이 커버린 살라딘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지만, 진군 중 얻게되는 열병에 걸려 누레딘이 사망하게 된다.

누레딘이 사망하게 되자, 살라딘은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아이유브 왕조를 수립한다. 초기에는 파티마 왕조의 잔당 소탕을 하면서 십자군과의 충돌을 피하였으나, 시리아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시작한 살라딘과 생존을 위해 항상 몸부림치던 십자군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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