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 십자군 이야기(2) – 제 1차 십자군

제 1차 십자군 – 피의 천국(The Heaven of Bloods)

역사 연표

  • 1097년 4월 26일: 제 1차 십자군 니케아에 접근
  • 1097년 6월 19일: 제 1차 십자군의 니케아 함락 성공
  • 1097년 7월 1일: 도릴레이움 전투 – 1차 십자군 승리
  • 1098년 6월 2일: 안티옥 함락
  • 1098년: 보두앵 1세, 에데사 백작령 수립
  • 1099년: 보에몽 1세, 안티옥 공작령 수립
  •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함락

역사적 배경

룸 술탄령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장점이 젊음에서 오는 패기였다면, 그의 단점 역시 젊음에서 기인한 경솔함이었다. 오합지졸 무리인 군중 십자군에게 승리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첩자들이 보내오는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주적은 유럽의 순례자 무리가 아닌 북동부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다니슈멘드 왕조였다. 선대 술탄 때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다니슈멘드는 호시탐탐 룸 술탄국으로 자신의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입장에서는 십자군보다 우선순위에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1차 십자군은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물리친 군중 십자군 같은 시골뜨기들이 아니었다. 유럽의 각 지방 영주였던 그들은 정식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예 군사를 직접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 정규군에는 중세 유럽 전투의 핵심 병력인 ‘기사(Knights)’가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다.

다수의 기사, 무장한 보병,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순례자들로 구성된 제 1차 십자군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하 로엔(Lower Lorraine)의 영주 고드프루아(Godfrey of Bouillon), 타란토(Taranto)의 공작 보에몽(Bohemond of Taranto), 툴루즈(Toulouse)의 백작 레몽 4세(Raymond IV of Toulouse)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표하여 주교 아데마르(Adhemar of Le Puy)까지 총 4인이었다(군중 십자군을 이끌었던 은자 피에르 역시 제 1차 십자군에 합류하지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클레르몽 교회회의 이후 각자의 영지에서 출발하여 하나 둘,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다. 제일 먼저 출발한 고드프루아가 1096년 12월 23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게 되며, 이후 1097년 4월.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레몽과 아데마르 주교, 보에몽이 차례로 입성한다.


큰 지도에서 제 1차 십자군의 경로/The First Crusade 보기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미묘한 환대였다. 서방에서의 지원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그였지만, 이미 군중 십자군의  난동을 경험했던 그는 제 1차 십자군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셀주크에게 빼앗긴 아나톨리아 지역을 되찾을 힘이 없었던 황제는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는 한 편, 이들 십자군 제후들을 상대로 황제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도록 압박 하였다. 충성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각 영주들은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바칠 것. 2) 황제의 가신으로써 원정 중 획득한 영토는 비잔티움에 귀속 된다. 3) 비잔틴 제국 황제의 생명과 명예를 존중하고, 그것이 침범 당하지 않도록 감시하며, 그 상태가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충성 서약에 대하여 각 영주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별 다른 주저없이 서약을 하는 영주가 있었던 반면, 이미 충성을 서약한 군주(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있는 고드프루아 같은 경우에는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지를 향하기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야 했고, 이는 비잔틴 제국의 해군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모든 십자군 참가 영주들이 알렉시오스 1세의 충성 서약서에 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이들은 하나 둘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가기 시작한다. 1097년 4월 26일, 1차 십자군은 첫번째 원정 목표인 니케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6일 니케아의 성벽에 모습을 나타낸 프랑크 인들은 그들의 신을 위한 전쟁을 이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주요 인물들

고드프루아 드 부용(1060 ~ 1100)

하 로렌 지방의 영주였던 고드프루아는 대표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파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에게 로렌 공작령의 상속권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황제를 위하여 전쟁을 벌이며 충성한 댓가로 1089년에 로렌 공작령에 대한 상속을 인정 받았다.

1096년 로마 가톨릭 교황 우르비노 2세의 십자군 준동에 호흥하여 1차 십자군에 합류하였으며, 고난 끝에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1099년에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의 초대 성묘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 – Advocate of the Holy Sepulchre)로 등극하며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지만, 얼마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단순 병사, 독살, 암살자(Assassins)에 의한 피살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전통있는 영주 가문의 출생이기도 했으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여러 전장을 누비면서 경력을 쌓으면서 부하들로부터 인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사실상 권력에 대한 욕구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던 십자군 내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수장으로 고드프루아가 추대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온화한 성품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툴루즈의 레몽 4세(1041 ~ 1105)

툴루즈의 백작 기욤 4세(William IV, Count of Toulouse)의 동생이었으나, 자신의 형이 레몽 4세의 질녀인 아키텐 공비(Philippa, Countess of Toulouse)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자 질녀의 지위를 찬탈하고 툴루즈 백작이 되었다. 이후 툴루즈를 통치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교도와 전투를 벌였고 이러한 군사적 경험 때문에 제 1차 십자군에 제일 먼저 참가하게 된다.

백전 노장에 제 1차 십자군 참전자 중 유일하게 이슬람 세력과 싸워 본 경험이 있는 레몽 4세이지만, 연륜에 맞는 인망은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였던 듯 하다.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아랫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였고, 고집불통에 권력욕까지 있어서 제 1차 십자군의 지휘부 내에서도 종종 불화를 일으키곤 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이후 벌어진 아스칼론 전투에서 고드프루아와의 다툼을 계기로 십자군을 이탈하게 되며, 이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원조를 받아 시리아 지방의 트리폴리 원정을 나서지만, 도중에 병사하게 된다.

보에몽 드 타란토(1058 ~ 1111)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 로베르토 기스카르(Robert Guiscard)의 장남인 보에몽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로 부터 부대 일부를 맡아 지휘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았다. 계모 시켈가이타(Sikelgaita)에 의해 유산 상속권에서 배제되자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다가 제 1차 십자군에에 참가하게 된다.

훤칠한 키와 미남이었다고 전해지고, 특히 이성에게 많은 호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다, 십자군 참전 직전 까지 약탈을 벌인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과거를 불문하고 충성 서약을 하는 등, 후안무치 한 면을 가진 보에몽은 그러한 성격 때문에 후세에 십자군이 벌인 만행(전쟁 중 식인에 대한 소문, 마리트 안 누만의 학살)의 주인공이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안티옥 공방전 승리 이후 안티옥을 거점으로 안티옥 공작령을 수립하나 1100년 다니슈멘드에게 포로가 되어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다. 포로에서 풀려 난 후 비잔틴 제국과 세력 다툼을 벌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1111년에 사망하게 된다.

아데마르 주교(? ~ 1098)

프랑스의 르 퓌의 주교인 아데마르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우르비노 2세가 십자군을 주창 할 때 열광적으로 호응을 한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이후 그는 교황 특사로 임명되고 로마 가톨릭 교황의 전권 대리인으로써 성지로 향하는 군대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후 제 1차 십자군에서 아데마르는 교회 측을 대표하는 지휘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직접적인 군사적인 활동은 자제하였지만,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위기에 빠진 십자군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사제직에 입문하기 전 군에 복무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 보다는 각 영주들로 구성된 제 1차 십자군의 지휘부에서 발생하는 의견 대립을 조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안티옥 함락 직후 성창(예수 그리스도 처형에 쓰인 통칭 ‘룽기누스의 창’)이 발견된 사건에 대하여 그는 성창이 가짜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문제로 인하여 이에 대해 함구하였다고 한다. 안티옥 함락 후 투르크군에 역포위 된 상태에서 이를 격파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며, 이후 발생한 십자군 지휘부의 대립을 조정하던 중 티푸스에 걸려 1098년 8월 1일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타티키오스(? ~ 1099)

비잔틴 제국의 장군. 알렉시우스 1세 의 명에 의해 제 1차 십자군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제 1차 십자군과 동행하면서 아나톨리아 – 시리아 지방이 초행인 십자군을 예루살렘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누엘 보우토미테스(1086 ~ 1112)

비잔틴 제국의 장군 니케아 공방전에서 비잔틴 제국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한다. 십자군 측 몰래 니케아 방어군과 내통하여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니케아를 비잔틴 제국령으로 복속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후일 십자군 국가들이 출현하고 보에몽, 탄크레드와 대립하면서 그들을 안티옥으로부터 몰아내는데 앞장선다.

에르겐(? ~ ?)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처. 만삭의 몸으로 니케아 방어전을 지휘한다(방어전이 계속되는 중에 결국 출산을 하지만, 다행이 순산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원래 역사 기록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안나 콤네네의 <<알렉시아드>> 에서는 스마이나의 장군 차카의 딸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니케아 함락 이후 비잔틴 제국에 투항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생애를 보낸다.

현자 다니슈멘드(? ~ 1104)

“다니슈멘드 왕의 무훈가”라는 유명한 서사시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뛰어난 장수이자 다양한 학문을 장려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아나톨리아의 북동부를 장악한 그는 세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직간접적으로 대치하였으나,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제 1차 십자군과의 회전을 치루기 위해 화평을 제안하였을 때, 이를 신사적으로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니케아를 제 1차 십자군에 빼앗긴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함께 연합 전선을 펼쳐 도릴레움(Dorylaeum) 전투를 치룬다.

니케아의 함락과 안티옥의 비극

제 1차 십자군이 니케아를 포위했을 당시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다니슈멘드와 대치중이었다. 니케아 포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다니슈멘드와의 결전도 뒤로 한 채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부랴부랴 니케아로 돌아왔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포위군을 물리치고자 몇번의 공세가 이어졌지만, 결국 젊은 술탄은 만삭인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를 눈앞에 두고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술탄이 퇴각함에 따라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사라진 니케아는 비잔틴 제국의 장수 마누엘 보우토미테스와의 밀약을 통하여 도시의 소유권을 비잔틴 황제에게 바치는 대신, 약탈과 살육은 피할 수 있었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성전(Jihad)를 선포하고 병력을 다시 재편성한다. 어제의 적이였던 다니슈멘드에게 동맹을 요청할 정도로 그는 절체절명이었다. 서방에서 다가오는 적 세력이 자신에게도 결국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한 다니슈멘드는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의 동맹에 동의한다.

1097년 7월 1일 니케아를 빠져나온 제 1차 십자군은 도릴레이움 계곡으로 향하게 된다. 가파른 협곡 지형이었던 도릴레이움에서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다니슈멘드는 십자군 부대를 기습하지만, 기사의 엄청난 위력 앞에 버티지 못하고 크게 대패하게 된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다니슈멘드는 포로가 되는 것을 면했지만, 엄청난 수의 사상자와 전리품들을 남겨둔 체 겨우 몸만 빠져나오는 신세가 된다.


큰 지도에서 제 1차 십자군 주요 전적지/The Battle Grounds of the first crusade 보기

연승이었지만 제 1차 십자군의 진격 상황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병참(Logistics)의 문제가 그들의 가장 큰 발목을 잡았다. 기본적으로 기나긴 여정에 대비한 군량은 가져오지 않았다. 병참이 원할하지 않을 때의 수단인 약탈 마저도 게릴라 전술로 돌입한 킬리지 아르슬란 1세와 다니슈멘드의 초토화 작전에 의하여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배고픔과 황량한 산악 지형의 가혹한 기후, 거기에 룸 술탄군의 집요한 게릴라식 전술까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광신적인 신앙심으로 버틴 십자군은 보통의 경우 3개월이면 도착할 안티옥에 무려 6개월의 시간이 걸려서 도착한다.

피루즈
카르부가

안티옥 공방전은 전적으로 수비측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중세 시대의 공성전은 방비만 잘 하고 있다면 수성측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데다가, 안티옥은 원군을 기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십자군 전력은 안티옥에 오는 동안 계속적으로 적에게 시달렸고, 보급이 원할하지 않아 사기 역시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상황을 역전 시킨 것은 투르크 제국의 내부 분열에 있었다. 안티옥의 피루즈(Firouz)가 전시 암거래로 처벌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배신 행위(자신의 담당 성벽을 십자군 지휘관 중 하나인 보에몽에게 넘겨버렸다)를 저지르는 바람에 8개월이나 수성하고 있었던 안티옥은 하루 아침에 십자군에 의해 점령된다. 게다가 원군으로 온 카르부가(Kerbogha)의 부대는 안티옥을 막 점령한 십자군을 역으로 포위하는데 성공하지만, 휘하 장수들이 총대장을 배신하고 전선을 무단 이탈하는 바람에 ‘성창 발견’으로 사기가 오른 십자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한다.

안티옥이 십자군에 넘어간 직후 안티옥은 십자군이 벌이는 살육과 약탈로 인하여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수만에 달하는 민간인 희생자가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광기는 이후 ‘마라트 알 누만의 참극'(마라트 알 누만이라는 마을을 십자군 병사들이 약탈 및 방화 후, 마을 주민들을 잡아먹어버린 사건)을 넘어 예루살렘 공성전에 까지 이어진다.

예루살렘 공성전, 그리고 십자군 국가의 성립

안티옥의 점령 이후, 제 1차 십자군 지휘관 중 하나인 아데마르 주교가 질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지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진격을 멈추지 않는다. 1099년 6월 7일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은 곧바로 공성전 준비에 들어간다. 각종 공성 병기를 활용하는 등 준비를 갖춘 모습을 보이고, 이에 맞서는 파티마 왕조의 방어군도 수류탄 병기인 ‘그리스의 불’을 적극 활용 하면서 치열하게 방어에 나서지만 공성전이 벌어지고 약 한 달여가 지난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의 성벽이 십자군에 의해 점령 당하면서 전투가 마무리되게 된다. 예루살렘 공성전 역시 십자군에 의한 이교도 숙청이 일어났다. 십자군은 사원으로 피신해있던 여성, 어린이 들을 가둬둔 채 불을 질러 한꺼번에 죽이는가 하면, 닥치는 대로 타 종교의 사람들(여기에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포함되었다)을 죽이는 바람에 사람들의 피로 발목을 적실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살육은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이뤄졌다.

전쟁이 끝나고, 제 1차 십자군이 진군한 자리에는 이른바 ‘십자군 국가’들이 성립되었다. 제 1차 십자군에 참전한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은 나라들이 들어서게 된다.


큰 지도에서 십자군 국가(1099) 보기

  • 예루살렘 왕국 – 고드프루아 드 부용
  • 안티옥 공작령 – 보에몽 드 타란토
  • 에데사 백작령 – 보두앵 1세

십자군 국가 성립 이후에도 십자군의 지휘부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좀 더 확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때문에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상태였지만, 이슬람 측이 이를 재탈환의 기회로 삼지 못한 것은 그들 역시 기나긴 권력 투쟁으로 인하여, 하나로 합쳐 저항해야 할 구심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반세기가 지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 Saladin)이 나타나기까지 계속 된다.

한편 제 1차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유럽에도 전해지게 되고, 이는 대중과 제 1차 십자군 때에는 미동도 하지않던 각 국가의 왕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성지 순례라는 미명 아래, 천국에 발을 들이기 위해 이교도를 처단하겠다는 광적인 들불이 점차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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