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 십자군 이야기(6) – 콘스탄티노플 함락

제 4차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의 몰락

역사 연표

  • 1195년: 이사키오스 2세(Issac II), 자신의 형인 알렉시오스 3세(Alexios III)에게 황위를 찬탈당한다.
  • 1198년: 로마 카톨릭 교황에 인노첸시오 3세(Innocent III)가 취임하다. 교황은 네번째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다.
  • 1201년: 각국의 영주들이 모여 십자군 결성을 확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군수 계약을 맺는다.
  • 1202년 10월 8일: 십자군의 저조한 참여율로 인하여 계약이 파기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십자군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같은 로마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 왕국의 도시 차라(Zara)를 공격한다. 이에 교황은 십자군 전원을 파문에 처한다.
  • 1203년 4월: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Alexios IV)가 십자군을 찾아간다. 알렉시오스 3세를 비잔틴 제국에서 몰아내 줄 것을 요청.
  • 1203년 6월 24일: 십자군을 태운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다. 이후 약 한달여간 공방전이 펼쳐지고,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승리한다.
  • 1204년 4월 9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시민 폭동 발생.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가 살해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비잔틴 제국에 개입.
  • 1204년 5월 12일: 비잔틴 제국의 몰락.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라틴 제국을 건설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Baldwin I of Constantinople)를 초대 황제로 추대한다.

역사적 배경

제 3차 십자군 이후 1200 년대 초의 중세 유럽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잉글랜드 왕국은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사후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에 빠져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역시 내전에 휩싸여있는 상태였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던 아이유브 왕조 역시 살라딘 사후 정권 획득을 위한 정치적인 혼란에 빠져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점차 혼란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황인 인노첸시오 3세는  1198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 새로운 십자군의 결성을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에 응한 것은 제 3차 십자군 때와 달리, 유력 국가의 국왕이 아닌 지방 영주들이었다. 영주들과 기사들이 중심이 되었던 십자군이었던 제 1차 십자군의 성공을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이 이번 십자군에 대한 기대를 품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결성된 제 4차 십자군은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해로를 이용하여 성지에 도착할 계획을 수립한다. 일개 영주들이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거래를 통하여 성지까지 이동할 함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제 4차 십자군과의 계약을 수락하였다.

  • 33,500명의 사람과 4,500마리의 말을 이집트로 수송한다.
  • 인원 및 군마에 대한 1년치 식량을 베네치아 공화국이 준비한다.
  • 제 4차 십자군은 이에 대한 비용으로 총 8만 5천 마르크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지급한다.

하지만, 이 계약은 곧 틀어지게 되었는데, 제 4차 십자군에 참전을 한 총 인원이 예상 인원을 훨씬 밑도는 1만 여명에 불과했고,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지급해야 할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측에서도 미지급 비용 부분에 대한 할인에 난색을 표했는데, 이미 제 4차 십자군과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큰 지도에서 베네치아와 차라 / Venezia and Zara 보기

결국 대안으로 결정된 사항은 당시 헝가리 왕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도시인 차라(Zara)에 대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협동 공성이었다. 아드리아 해에 연안 위치한 차라는 베네치아의 해상 무역로 확보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배네치아 공화국의 세력권에 넣어야 할 요충지였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모두가 찬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헝가리 왕국은 십자군과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국가였고, 때문에 같은 종교를 가진 국가의 도시를 십자군이 공격한다는 것에 대하여 주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Doge: 국가 원수)였던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의 협상력에 굴복하여 십자군 역시 차라 공방전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공방전이 벌어진 1주일 만에 차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십자군이 같은 로마 카톨릭 국가의 도시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분노하여 십자군 전체를 파문에 처해버렸다. 당황한 십자군 지도자들은 교황에게 사죄를 하고 곧 파문은 해제되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파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에 이득이 되는 일을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차라를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잔틴 제국의 망명 황자인 알렉시오스 4세가 지도부를 방문한다. 그는 십자군이 현재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키우스 2세를 복위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하여 거사 성공 시 20만 마르크의 군자금, 비잔틴 제국군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십자군에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관할로 주겠다고 제안하게 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수송 선단을 아드리아 해에 띄우게 된다.

주요 인물들

엔리코 단돌로(1107? ~ 1205)

베네치아 공화국을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외교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비잔틴 제국과의 강화협상을 하기도 하였고, 시칠리아에 베네치아 대사로 2회나 파견되기도 하였다.  엔리코 단돌로는 1193년 1월 1일 베네치아의 제 39대 도제(Doge: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는데, 이미 고령에 시력의 대부분을 잃었으나,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고 한다.

제 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접근해 왔을때, 그는 뛰어난 외교적인 수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익을 증강 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십자군에 의한 차라(Zara) 공격과 이후 콘스탄티노플 공방은 사실상 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 무역에 있어서 다른 무역 도시 국가(제노바, 피사 등)에 비하여 월등히 높은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라틴 제국이 성립 된 이후, 병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소피아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보두앵 1세(1172 ~1205)

플랑드르와 에노의 백작인 보두앵 1세는 제 4차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비잔틴 제국 침략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시킨 후, 괴뢰 정부인 라틴 제국을 설립 할 때 초대 황제로 옹립된다.

보두앵 1세는 라틴 제국의 황제로 등극 한 이후 비잔틴 제국의 전통을 폐기하고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비슷한 제도를 만들어 기사들과 제후들에게 봉토로 나누어주었다. 라틴 제국 건립 이후 비잔틴 재건 세력의 반란과 함께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인 칼로얀이 공격해오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하여 분투하나, 1205년 불가리아군에 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4세(1182 ~ 1204)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로, 자신의 큰아버지인 알렉시오스 3세가 쿠테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하자, 비잔틴 제국을 빠져나와 신성로마제국에 의탁하게 된다. 이후 제 4차 십자군이 차라를 점령하자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한다.

제 4차 십자군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되었을 때, 유폐되어 있던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오르게 되지만, 정치/외교적으로 무리한 결정을 내린 가운데 시민 폭동으로 인하여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3세(1153 ~ 1211)

이사키오스 2세의 형. 이사키오스 2세가 불가리아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1195년 4월, 쿠데타에 성공하여 동생의 황위를 빼앗는다. 하지만 권력 욕심에 비하여 통지 능력은 무능했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경제난은 점차 심각해졌으며, 때문에 발칸 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감소하였다.

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할 때, 그는 막대한 재산을 챙겨 트라키아로 도망쳤다. 이후 망명지에서 자신의 권력을 찾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211년에 유폐 당한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사키오스 2세(1156 ~1204)

이사키오스는 아나톨리아의 군사귀족 가문 출신으로 본래 황가와는 먼 친척관계였다. 그는 황제인 안드로니쿠스 1세가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비운 사이에 시민 반란을 주도하여 그들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제국의 영토는 점차 축소되어 갔으며, 군사력 역시 조선업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맡기는 결정을 함으로써 해군력 약화를 초래하였다. 내정에서는 부정부패를 조장하기도 하는 등, 제국의 몰락의 단초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의의는 점차 퇴색되어만가고…

1203년 6월 24일 십자군 병력을 실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3중 성벽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제국의 수도였지만, 당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3세는 무능했고, 제국군의 군사력도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약 한 달여의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게 함락된다.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4세와의 약속대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이사키오스 2세를 다시 제위에 앉히고 알렉시오스 4세 역시 공동 황제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과 밀약한 군사 원조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영향권에 둔다고 하는 약속 또한 동방 정교를 믿고 있었던 시민들의 맹렬한 반발만 불러왔을 뿐이었다. 결국 십자군에 지급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올린 세금으로 인하여 1204년 시민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 모두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폭동을 빌미로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공격한다. 1204년 4월 9일 감행 된 총 공격으로 인하여 수많은 문화제, 보물등이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하여 약탈 당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여 지방 곳곳에 망명 정부들이 들어서게 되고,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새로운 비잔틴 제국-라틴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황은 같은 카톨릭계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를 공격한 일에 탐탁치는 않았으나, 이를 승인 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사실상 제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무리 되어버렸다.

비잔틴 제국의 망명 정권은 다음과 같다.

  • 니케아 제국 – 훗날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하여 비잔틴 제국을 재건한다
  • 에페이로스 공국
  • 트레비존드 제국

본문에 사용된 캐릭터 이미지의 저작권은 Pied Pipers Entertainment에 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캐릭터 이미지는 게임 제작 중 변경 될 수 있습니다.

 

아미 앤 스트레테지 개발 근황 – 2012년 5월 2주

근황입니다. 벌써 5월 2주라니… 5월 2주라니…

날씨가 무척이나 따뜻… 아니 후덥지근 합니다

요즘은 낮 시간 때만 되면 체감 온도가 30도를 육박하는 것 같습니다. 사무실이 남향이라 따사로운 햇빛을 그대로 내리 꽂아 주어서 생기는 일인 것 같군요. 덕분에 점심 이후에는 팀원들이 대부분 반은 눈이 풀려있는 상황입니다.

하고 있는 일

게임에 새로운 모드가 추가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냥 전투 시스템 테스트 용도 수준의 것이었는데, 어째 새로운 게임이 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

탈력

전투 시스템 디자인이 난항에 난항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은데, 이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게임 출시 이후에 포스트모템으로 썰을 풀어도 될 듯 합니다.

여튼, 전투 시스템 덕분에 사실 내부적으로 오늘 예정되어 있었던 테스터 릴리즈는 보류 상태.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 중 입니다. 잘 될꺼에요, 아마.

하지만 다음주에는 악마가 (...)

 

 

AnS 십자군 이야기(5) – 라이온하트(The Lionheart)

제 3차 십자군 – 살라딘 vs. 리처드 1세

역사 연표

  •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에 의하여 예루살렘 함락. 이후 이 소식은 전 유럽에 퍼지게 된다.
  • 1188년: 로마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오 8세의 성지 탈환 주창. 제 3차 십자군 결성.
  • 1188년 3월 27일: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십자군 제 1진이 출발.
  • 1189년: 기 드 뤼지냥이 살라딘에게서 풀려나다.
  • 1190년 5월 18일: 프리드리히 1세의 독일 군이 이코니움을 점령.
  • 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1세. 살레프 강에서 익사.
  • 1190년 7월: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위하여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만나다.
  • 1191년 5월: 필리프 2세 단독으로 아크레에 도착.
  • 1191년 6월 8일: 리처드 1세 아크레에 도착.
  • 1191년 7월 12일: 제 3차 십자군에 의하여 아크레 함락. 필리프 2세는 병을 빌미로 십자군을 이탈한다.
  • 1191년 9월 7일: 아수프 전투 발발. 리처드 1세의 승리.
  • 1192년 9월 2일: 살라딘과 리처드 1세간 휴전 협정 조인.
  • 1192년 12월: 리처드 1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사로잡히다.

역사적 배경

예루살렘이 살라딘에 의하여 함락됨으로써, 제 1차 십자군 이후 거의 1세기 가까이 로마 카톨릭 세력에 의해 점령되었던 예루살렘이 이슬람 측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소식이 서유럽에 전해지자, 파급은 어마어마했다. 로마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성지 탈환을 목표로 내세운 십자군 파견을 호소하였고, 이 호소에 호응하여,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진행 중이던 영토 분쟁을 잠시 중단하고 십자군 파견을 위한 준비에 나설 정도였다.

후일 왕들의 십자군(Kings’ Crusade)라고 불리게 되는 제 3차 십자군은 이름 만큼이나 참가한 제후들의 면면은 대단했으며, 이후 수 많은 전설과 설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며, 로빈후드 설화로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 프랑스 왕국에 강력한 통치 기반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 받는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 II Augustus),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붉은 수염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던 프리드리히 1세(Frederich I Barbarossa)를 필두로 유럽 전역의 영주들과 기사들이 제 3차 십자군에 참전하게 된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제 3차 십자군이었지만, 그 여정은 다른 십자군에 비하여 그다지 순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십자군의 선봉에 섰던 프리드리히 1세는 1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기세 좋게 아나톨리아 지역에 도달하여 당시 룸 술탄국의 수도였던 이코니움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1190년 6월 10일, 아나톨리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킬리키아의 살레프 강(Saleph river)에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사인은 익사였다.

뒤늦게 출발한 리처드와 필리프 2세는 여정의 중간까지는 같이 동행을 한다. 애초에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분쟁은 점차 그 골이 깊어가기만 했다. 엘레오노르의 결혼 지참금 문제(아키텐의 봉토)는 리처드와 필리프 2세의 통치에 들어서면서 우호적인 관계로 봉합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원정 중 발생한 대립으로 인하여 점차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불안의 조짐이 보였던 제 3차 십자군은, 1191년 7월 12일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항구 도시인 아크레를 함락시킨다. 하지만 아크레 함락 직후 병을 핑계로 필리프 2세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고, 아크레 공성전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오스트리아의 공작인 레오폴드 5세(Leopold V, Duke of Austria) 역시 리처드가 홀대(국왕인 자신의 깃발과 일개 공작인 레오폴드 5세의 깃발이 함께 나부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하여 레오폴드 5세의 군기를 진흙탕에 던져버렸다)하는 바람에 앙심을 품고 십자군에서 이탈하였다.


큰 지도에서 제 3차 십자군 주요 전적지/The Battle Grounds of the 3rd crusade 보기

상황은 리처드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십자군의 주력 대부분은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 같은 예루살렘의 망명 귀족들은 여전히 왕국의 계승권을 두고 지리한 정략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살라딘의 위력이 급감하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그는 여전히 시리아와 이집트의 위대한 통치자였다.

주요 인물들

프리드리히 1세(1122 ~ 1190)

신성로마제국은 제국(Empire)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그 권력 기반이 항상 취약하였다. 황제는 사실상의 선출직이나 마찬가지였고, 지방 영주들의 충성이 없이는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더하여 로마 카톨릭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 등으로 인한 불화는 중세 유럽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 역시 이러한 중세의 정치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는 여섯번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기도 하고, 자신의 구원 요청을 무시한 벨프 가의 하인리히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이후 황제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제 3차 십자군에 참전하게 된다.

1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에 당도한 그였지만,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한참 전에 살레프 강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버린다(그가 빠져 죽은 강의 수심은 일반 성인의 허리도 잠기지 않는 정도의 높이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신성로마제국군은 룸 술탄국 및 아이유브 왕조의 군사에 의하여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이후 일부 패잔병이 트리폴리 등에 도착하여 리처드와 필리프 2세가 이끄는 십자군에 참전을 한다.

특유의 붉은 수염(바르바로사-Barbarossa)이 특징이었던 그는 아서왕의 전설과 같은 수많은 전설을 남겼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소비에트 연방 침공 작전이었던 바르바로사 작전은 프리드리히 1세와 관련한 전설에 기반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리처드 1세(1157 ~ 1199)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2세와 어머니 엘레오노르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난 리처드 1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용맹을 떨친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사자심왕(Lionheart)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중세 기사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는 부친과의 권력 투쟁에 나서면서, 프랑스 왕국 국왕인 필리프 2세와 결탁하기도 하였다. 왕위를 획득한 리처드는 곧바로 제 3차 십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원정을 위한 가혹한 세금을 물려 백성들과 봉건 영주들에게 원성을 받았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이 여의치 않자 성, 영지, 관직 등을 매매하여 비용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십자군 원정에서 살라딘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십자군 내의 불화와 잉글랜드 내에서의 위험 신호-섭정 중이었던 동생 존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첩보 때문에 결국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국을 서두르지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사로 잡히게 된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막대한 석방금을 지불하고 풀려나지만 왕권을 회복한 지 1개월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 왕국으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다시 잉글랜드를 떠난다. 이후 1199년  리모주 자작의 반란을 진압 하던 중, 초저녁에 아무런 무장도 없이 성벽 가까이를 거닐다가 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목을 관통 당하는 중상을 입고 사망하게 된다.

셔우드 숲의 로빈후드 설화는 리처드가 하인리히 6세에게 당시 섭정이었던 존의 폭거에 항거한 로빈후드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시의 수 많은 도적의 창궐은 리처드의 전쟁 선호와 그에 따른 가혹한 세금 착취에 의한 것이라 한다.

필리프 2세(1165 ~ 1223)

프랑스 왕국의 국왕으로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정략적이니 술수로 프랑스 왕국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인물. 때문에 존엄왕(Augustus)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2세와 아들인 리처드의 대립을 종용하여 헨리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성공하기도 하고, 이후 제 3차 십자군 참전 후, 리처드가 팔레스타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홀로 프랑스 왕국에 돌아와 대륙 내의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아키텐 등)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넣기 위한 시도들을 벌인다. 이를 위하여 리처드의 동생인 존을 충동질 하여 왕위 찬탈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는 프랑스 왕국의 영토를 늘리는 데 주력하였으며, 확장 된 영토 내에 자신의 행정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식의 통치 체계를 확립하였다.

레오폴드 5세(1157 ~ 1194)

오스트리아의 귀족. 공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제 3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아크레 공방전 당시 아크레 함락에 공을 세우지만, 리처드 1세에게 홀대 받은 이후 그에 대한 원한을 가지게 된다.

이후 리처드 1세가 육로를 통하여 잉글랜드로 귀환 할 때 그를 사로잡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팔아 넘겨버린다.

남은 것은 사자의 허무한 기백 뿐이었더라

십자군의 주요 군사력이 이탈한 상황에서도 리처드는 용맹하게 싸웠다. 살라딘의 대군에 맞서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예루살렘을 회복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본국의 상황도 그리 좋진 않았다. 섭정 통치 중이었던 동생 존은 형의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십자군 원정 중 틀어졌던 필리프 2세와의 관계 역시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리처드는 살라딘과 1년여에 걸친 정전 협상 끝에 1192년 9월 2일 휴전 협정을 맺고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길에 오른 리처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가 모욕을 줬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였다. 그는 리처드를 사로잡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팔아 넘겨버렸고, 막대한 석방금을 받아 그를 풀어준다. 신성로마제국에서 풀려난 이후 잉글랜드에 도착한 리처드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처벌하였지만, 주동자이자 동생인 존에 대해서는 용서와 함께 영지의 일부를 돌려주기도 하였다.

제 3차 십자군의 성과는 성지 회복이라는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살라딘과 리처드의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 카톨릭 신자들의 자유로운 왕례는 계속 유지 되었다. 또한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로마 카톨릭 국가들이 이후 약 1세기 동안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슬람 세계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살라딘은 제 3차 십자군 원정이 종료 되고 1년 뒤인 1193년 3월 4일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한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에서는 통치권을 둘러싼 싸움이 9년간 계속되고,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이 최종 승리자가 된다.

본문에 사용된 캐릭터 이미지의 저작권은 Pied Pipers Entertainment에 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캐릭터 이미지는 게임 제작 중 변경 될 수 있습니다.